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담 May 12. 2016

일천구백팔십년 오월, 그 푸르른 날에

#푸르른 날에 #5.18

일천구백팔십년 오월, 그날에도 이 강산의 하늘은 맑고 푸르렀으리라. 산천초목도 새 생명을 뽐내며 싱그러웠으리라.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고 젊은 연인들은 풋사랑에 가슴 설렜으리라. 일천구백팔십년 오월 십팔일 광주에서도, 하늘은 맑고 신록은 푸르렀으리라.


연극 <푸르른 날에>는 1980년 5월 광주를 배경으로 한다. 풋내기 대학생 오민호와 그가 사랑하는 여인 윤정혜가 온몸으로 겪어야만 했던 암울한 시대의 상처, 그리고 치유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사실 민호가 겪는 고통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극의 내러티브는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다. 신선한 플롯과 미장센을 빼면 신파극에 가깝다. 그러나 그 울림의 무게는 가늠하기가 어렵다. 민호가 혹독한 고문에 못 이겨 김남주 시인의 진혼가를 울부짖을 때, 자신의 아이를 가진 정혜를 향해 합장하고 뒤돌아설 때, 신파의 뻔한 의도임을 알면서도 속절없이 무너져 내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는 수밖에 없다.


<푸르른 날에>가 갖는 묵직한 울림의 근원은 극이 내포하고 있는 삶의 구체성에 있을 것이다. 연극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시대적 필연이나 역사적 의의를 강조하지 않는다. 오직 한 개인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감내해야만 했던 고통을 있는 그대로 풀어놓는다. 한낱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양심을 팔고, 미치지 않기 위하여 사랑하는 여자와 뱃속의 아이를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한 사내의 내면을 가까이에서 살핀다. 그럼으로써 삼십여 년의 세월 동안 조금씩 박제되어 가던 5.18의 역사적 의의를 생생하게 되살려 낸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암울한 시대를 직접 겪지 못한 나에게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은 그저 책에나 나오는 추상적 개념에 불과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활자 앞에 떠오르는 것들이란 몇 장의 이미지와 교과서에서 읽은 수사들뿐이었다. 더욱이 요즘 들어 대통령이 참배를 했느니 안 했느니, 누가 묘지의 상석을 밟았느니 하는 우스꽝스러운 것들이 정치쟁점화되면서 5.18의 실체는 점점 더 희미해져 가고 있는 듯하다. 분명 여야 정치인들이 공사가 다망한 와중에 망월동 묘역에 모여 점잖은 척 고개 숙이고 있는 모습, 그 어디에도 실체는 있지 않을 것이다.


5.18의 본질은 교과서도, 정치인들도, 망월동 묘역에 묻힌 망자들도 아닌, 오로지 그 시대를 살아서 겪어낸 사람들의 상처 속에 있을 것이다.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저 살아남기 위해 한 개인이 감내해야만 했던 치욕과 고난 속에 있을 것이다. 때리는 자도 맞는 자도, 죽인 자도 죽은 자도, 고문하는 자도 고문당하는 자도 끝끝내 떨쳐버릴 수 없을 그 날의 참혹한 풍경이 5.18의 본모습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상처는 개별적이어도 아픔은 개별적일 수 없다. 그 상처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 삼촌, 이모, 형, 누나의 상처이다. 그들의 상처이지만, 그들의 상처이기에, 나의 아픔이기도 하다. 시대가 할퀴고 간 상처는 그들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여전히 피고름을 흘리고 있다. 나는, 아파하지 않을 수 없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상처는 아물어 흉터가 되어갈 것이다. 민호와 정혜의 딸 운화는 그 아비, 어미와는 다른 나름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상처가 아물어 흉터가 되더라도 아픔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5.18의 주범이 여전히 국민의 세금으로 호위를 받으며, 불법 축재한 부로 호의호식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아픔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지러운 인간사는 관심 없다는 듯, 하늘은 계속 푸르고 신록은 싱그러울 것이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고, 풋사랑은 무르익어 열매를 맺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오지선다의 추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