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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담 May 12. 2016

나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욕망 #주체

상암에서 열린 나이키 우먼스 레이스 행사장에 다녀왔다. 20대만 참여할 수 있다는 이 행사에 7,000명이 넘는 여성들이 모였다. 그마저도 금세 마감이 되어 등록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다 하니 그 인기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행사장은 주최 측에서 제공한 검은색 티셔츠를 입은 여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장관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 풍경을 보는 내 마음 또한 헤아리기 어려웠다. 내가 좋아하는 여자들이 그렇게나 많이 모여 있었는데 나는 즐겁지 않았고, 오히려 불쾌했다. 그것은 '나는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적 상황으로 인한 당혹감을 넘어서는 일종의 공포였다. 수많은 스미스 요원을 맞닥뜨리는 <매트릭스 3>의 한 장면 같기도 했고, 조금 더 과장하면 히치콕의 영화 <새>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이들은 왜 달리려 하는가, 나는 의아했다. 분초를 다투며 어렵사리 등록을 하고 참가비를 내면서 날씨 좋은 토요일 오후에 상암까지 와서 꼭 달리고 싶은 것인가. 정말 달리고 싶어서 왔다면 왜 저렇게 화장을 진하게 하고 온 것일까. 이들은 과연 '달리고' 싶은 것인가. 아니라면 굳이 그런 노력 끝에 여기까지 온 이유는 무엇인가. 달리기를 즐기지 않는 사람들이 달리기 행사장에 수도 없이 많이 모여 있는 영문은 무엇인가.


건강을 강조하는 건강한 행사인데 정작 건강한 에너지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 중 대부분은 분명 달리러 온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 눈엔 그랬다. 달리고자 모인 그들에게서 '달리기'를 향한 열정보다는 다른 어떤 욕망들이 엿보였고, 그 욕망들의 합을 지켜보는 것은 두렵고 슬픈 일이었다. 그들이 발산하는 거대한 에너지에는 어딘지 모르게 키치의 악취가 강하게 풍겼다. 그녀들은 달리기 전과 후는 물론 달리는 와중에도 '셀카'를 부지런히 찍었고, 그 사진들은 SNS를 타고 그녀들보다 더 멀리 달려갔다.


그들은 '달리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달리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달린다'가 아니라 '나는 달리는 사람이다'라고 욕망할 때, 그 욕망은 이미 본인의 영역을 벗어난다. 타인에 의해 '당신은 달리는 사람이군요'라고 인식되어질 때 그것은 겨우 충족될 수 있다. 타인의 시선에 의해 완성되는 욕망은 그 자체로서 온전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욕망은 본인의 것이라 하기 어렵다. 본인의 것이 아닌 욕망을 욕망하는 자의 모습은 종종 위태롭다. 총 7km의 코스를 완주한 그녀들의 얼굴에서는 성취감보다 애잔함이 더 먼저 보였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그 시선을 자신의 위에 두는 것과 옆에 두는 것 사이의 거리는 멀다. 타인의 시선에 대한 갈망이 본질적인 것에 대한 욕망에 앞설 때, 삶은 주체로부터 멀어진다. 그 삶은 실체를 찾을 수 없는 타자의 욕망 속에서 어지러울 것이다. 반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타자의 시선과 적당히 멀어진 욕망은 싱싱하다. 주체의 영역 안에서 혼자 생존하고 스스로 재생산한다. 이 욕망이 내뿜는 에너지는 건강하다. 그리고 이 에너지는 삶과 주체를 묶어주는 강력한 끈이다. 내가 행사장에서 그녀들에게 기대했던 것은 아마 이런 종류의 싱싱함이었을 것이다.


우리 동네의 강변은 천혜의 달리기 코스이다. 서울에서 구리로 넘어가는 이 구간은 정말 기가 막히다. 탁 트인 공간에서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막힘없이 달릴 수 있다. 혼자만 알기에 너무 아까운 이 좋은 곳에 건강한 에너지를 내뿜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이 많이 찾아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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