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담 May 12. 2016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시 #여름

2009년 7월, 한여름의 태양이 관악을 뜨겁게 달굴 무렵, 1동 강의실로 학생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강의실 창문 밖으로는 자하연의 녹음이 눈부셨고 매미는 부지런히 몸을 떨며 요란하게 울어댔다. 가볍게 차려입은 학생들의 옷차림 사이로 앳된 열기가 아른거렸다. 강의실에 들어온 그는 학생들로 하여금 조를 지어 앉도록 했다. 예닐곱 명씩 둥글게 모여 앉은 학생들은 서로의 온도를 탐색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만두었는데, 서로의 체온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모두 그의 힘이었다. 그에게는 이 사람의 체온을 저 사람에게 전달하는 능력이 있었다.


문학작품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특히 많은 의미와 감정을 함축하고 있는 시를 온전하게 번역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짧은 텍스트 속에서 그 맥락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시가 주는 뭉클함을 고스란히 옮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원시를 완벽하게 이해해야 할 뿐만 아니라, 번역하고자 하는 언어 또한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둘 중 어느 한쪽이 모자라더라도 안 하느니만 못한 일이 된다. 그 불가능의 벽을 향해 그는 손짓했고, 학생들은 주저하지 않고 그를 따라나섰다. 그것 또한 모두 그의 힘이었는데, 그에게는 아무리 어려운 일도 쉬운 일처럼 보이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못니저 생각이 나겟지요, 그런대로 한세상지내시구려, 사노라면 니칠날잇스리다'라고 노래한 소월의 <못니저>는 Unforgettable일까, Cannot Forget일까, Unable to Forget일까. '못 잊어도 더러는 잊힐' 거라는 마음은 Someday you may forget에 더 가까운가, 아니면 Someday you will forget에 더 가까운가. 학생들은 둥글게 모여 앉아 시를 이야기했고, 그 이야기는 다시 시가 되어갔다. 시가 된 이야기 속에서 학생들은 앳된 볼을 붉혔고, 그는 미소 지었다.


시와 함께 그해 여름은 깊어갔다. 시를 읽는 눈은 자하연의 녹음처럼 눈부셨고, 시를 이야기하는 입은 매미의 울음처럼 부지런했다. 그렇게 한글로 쓰인 이 땅의 명시들은 영시로 다시 태어났다. 그 시들이 영어권 독자들에게 얼마만큼 감동을 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그곳에 둘러앉은 학생들은, 비록 온전치 않더라도 가장 중요한 무언가는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것은 이 사람의 따뜻함을 저 사람에게 전달하는 그 어렵고도 어려운 일을 쉬운 일처럼 만드는, 그의 특별한 능력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두 해가 지나고, 여름이 또 한 번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 그는 학생들 곁을 떠났다. 아직 하지 못한 말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는 그였지만, 죽음 앞에서도 늘 그래왔던 것처럼 미소 지으며 떠났다. 그를 떠나보내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지만, 아무리 어려운 일도 쉬워 보이게 만드는 그의 능력 덕분인지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또 그에게 배웠던, 가장 중요한 무언가는 반드시 전달할 수 있다는 믿음 덕분인지 학생들은 그리운 마음이 그에게 다다를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많은 학생들이 떠나가는 그를 보기 위해 둥글게 모여 앉았다. 모여 앉은 학생들은 앳된 눈시울을 붉히며 저마다의 시를 번역하여 그에게 보냈다. 그곳에서 그는 미소 짓고 있었다.


그해 여름, 그와 함께 보낸 한 달 동안 태양은 뜨거웠고, 강의실에 아른거리던 앳된 열기는 농밀해져 갔다. 학생들의 생생한 살갗이 내뿜는 열기로 그는 한편의 뜨거운 시를 썼고, 모두의 마음속에 온전하게 새겨주었다. 그 뜨거운 여름의 시는 더러는 잊히겠지만, 아마 오래오래 못 잊어 생각이 날 것이다.


* 故신광현 선생님 추모문집을 위한 글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