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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담 May 13. 2016

삶은 권태로움이어라

#삶의 굴레

거기 자네, 자네   보게. 자네 가만 보니 사는 것이  힘들어 보이는구먼.  그런가?  젊은이가  그리 오만상을 찌푸리고 다니나. 하긴 , 힘든  나이를 먹고  먹고의 문제는 아니지. 그래, 자네 운명이 자네에게  심한 장난을 치는가 보구먼.


자네, 사는 게 왜 힘든 줄 아나? 그건 자네가 살아있기 때문이라네. 살아있는 것이 곧 시련인 것이지. 별 다른 이유는 없다네. 그저 자네가 숨 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고 고난인 것이야. 꼬박꼬박 먹여줘야 하지, 제때 재워줘야 하지, 마려우면 싸줘야 하지, 어디 그 뿐인가, 매일 씻어줘야 하지, 맨 몸으로 다닐 수 없으니 입혀줘야 하지, 해주어야 할 일이 한두 가지인가. 게다가 툭하면 아프고, 화내고, 싸우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아주 난리들이 아닌가. 그러니 사는 것이 어찌 시련이 아닐 수 있겠는가.


목숨 붙어 있는 것들의 삶이란 크게 다르지 않다네. 자네, 미물이라고 삶이 편할 줄 아는가. 개 팔자가 상팔자라지만, 어디 진짜 그런가. 자기들이 보기에 편해 보이는 것이지, 개 삶이라고 편하기만 하겠는가. 목숨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붙어 있으려면 언제나 지불해야 할 대가가 있는 법이라네. 그것은 인간이나 미물이나 마찬가지야. 다만 그 대가가 다를 뿐이지. 그것은 태어났기 때문에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네. 태어나지 않았으면 모를까, 이미 태어나버린 걸 어쩌겠는가. 이 세상에 난 그 순간부터 삶의 굴레는 지워지는 것이라네.


그럼 자네는 이렇게 고민할 거야. 아니, 이렇게 힘든 삶을 왜 굳이 살아야 하느냐고. 안 그런가? 헌데, 이 고민도 삶이 주는 시련의 일부라네. 세상에 날 때 제 맘대로 나지 않았듯이, 뜰 때도 제 맘대로 뜨지 못하는 법이야. 죽을 때가 되어야만 죽는 것이지. 꼭 병에 걸리거나 나이를 먹어 죽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야.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자기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도 다 때가 되었기 때문이라네. 그때가 올 때까지 삶은 원하든 원치 않든 계속되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때가 언젠지를 몰라. 자네, 혹시 자네가 언제 죽을지 알고 있는가? 모른다면 그것만으로도 자네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이네. 그리고 그 이유만으로 계속 살아가야 하는 것이고.


삶은 언제나 그래왔다네. 세상이 평화롭고 정의로웠던 적이 언제 있었던가. 세상살이가 쉽고 편안한 적이 언제 있었던가. 아직도 지구 반대편에는 굶어 죽는 아이들이 태반이라고도 하고, 내전으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고도 하고, 지진으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사람들도 있다 하더구먼. 그렇게 따지고 들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네. 옛날에는 더 심하면 심했지, 어디 덜했겠는가.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라네. 옛날 사람들이 그랬고, 지구 반대편 사람들이 그렇다고 해서, 자네가 힘들지 않다는 말이 아니야.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법이고, 각자의 삶이 지우는 굴레의 무게를 홀로 견디며 살아간다네. 그 굴레는 그저 먹고사는 것에 지나지 않아. 먹고 살려는 것이 곧 삶의 무게인 것이지. 이거 너무 진부하지 않은가. 그래서 삶이 주는 시련은, 시련이라기보다 차라리 권태에 가깝네.


헌데, 참 흥미로운 것은 말이야, 이 권태로움이 살아가는 데 가장 큰 힘이 된다는 사실이라네. 이 지긋지긋한 권태가 사람들을 생각하게 하고, 움직이게 하며, 꿈꾸게 한다네. 언젠지 모를 그 날까지 계속 오늘을 살게 한다는 말씀이야. 태어난 이상 시련은 피할 수 없고, 그 시련은 늘 그래왔던 것이니, 시련을 시련이라 생각지 말고 차라리 권태롭다고 느낄 때, 자네는 비로소 자네의 삶을 온전히 살 수 있을 것이라네. 한번 사는 삶인데, 운명의 장난에 놀아나서야 되겠는가. 안 그런가?


젊은이, 이 늙은이의 주제넘는 참견일랑 잊어버리고, 힘내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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