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감정이라 명확히 정의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냥 지은을, 러디를, 제인을 보아오면서 자신도 모르게 쌓여왔던 것들이 겉으로 내비치지 않도록 속에서 응어리를 만들었고 결국 그 응어리가 더 이상 뭉치지 못해 터져버린 것이었다.
지은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해진은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렇게, 지금까지처럼 곁에서 지켜보고 그녀의 모습을 한 다른 이들을 그의 선에서 통제하는 것까지가 그의 한계였고 상황의 한계였다.
여전히 고인 눈물이 시야를 흐리게 만들었지만, 해진은 블랙보드 앞에 서서 자신이 정리했던 정보에 러디가 준 정보를 더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오늘로 지은을 만난 지 정확히 10년이 되었다.
지은과 지은의 모습을 한 모든 이들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김지은, 러디, 제인, 김지성.
“……박해진.”
해진은 자신의 이름을 그들의 이름 가까이 썼다.
퍼즐이 완성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 몸을 공유하고 있는 네 가지 인격과 현재 그들 모두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외부인까지.
“그것보다 더한 과거라면 기억하지 않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나보다 그게 훨씬 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해진은 또 한 번 주저앉았다.
자신의 이름을 썼던 하얀 마카를 손에 꼭 쥔 채 한계를 뛰어넘을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 자신을 원망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 소리는 단단한 벽 너머에 있는 러디에게 닿았다.
러디는 미소를 지었다.
온전히 해진을 비웃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자조적임이 포함되어 있는 미소였다.
“멍청한 것.”
상황상 러디가 말한 멍청한 이는 해진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미소를 보고 있자면 해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도 들었다.
러디는 살짝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엔 서슬 퍼런 누군가에 대한 증오 그리고 살의만이 가득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은 뒤에는 처참한 모습이 되도록 만들어서 끝내줄 테니까.”
* * *
해진이 지은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하도 형사가 되겠다고 고집을 피워대기에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지은이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내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치 그가 언젠가 이 물음을 할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지은은 웃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일할 거라면 아줌마랑 같이 일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 대답을 듣는 순간 해진은 처음으로 자신이 프로파일러가 된 것을 후회했다.
자신이 프로파일러가 아니었다면 지은이 형사가 되겠다고 이렇게 완강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너 고등학생 때 아침, 저녁으로 보는 것도 징글징글하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그거야 아줌마가 자꾸 야자 하지 말라고 아침, 저녁으로 찡찡대니까 그렇지. 나는 목표로 하는 게 있는데 말이야.”
“야. 내가 언제 찡찡댔어!”
“아줌마는 왜 나한테 아무것도 안 물어봤었어? 찜질방에 있던 사람들은 나한테 아주 많은 걸 물어봤었는데.”
갑자기 바뀐 화제였지만 지은의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했다.
그저 지은이 싫어할 것 같았기 때문에.
그 정보가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굳이 상대가 싫어하는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답을 얻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해진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 해진이 지은에게 어서 자신의 궁금증도 풀어 달라고 했다.
지은의 입이 열렸을 때 지은이 기억하는 이유가 나왔다.
해가 중천에 뜬 토요일 오후, 밥상머리 앞을 메우는 공기는 매우 탁해졌다.
“순간적인 연민이라 언젠간 똑같이 내쳐질 거라고 생각했어.”
잠깐의 정적.
그것을 깬 사람은 지은이었다.
가족에게도 버려진 사람인데 남은 더 버리기 쉽지 않겠느냐는 것.
그와 같은 일을 당한 사람의 지극히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법정후견인 하더라도 당시 지은에게 해진은 여전히 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아줌마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귀찮아하지 않고 대답해 줬어. 다정하게, 상냥하게. 낯간지러운 말인 것 같아서 안 하려고 했는데 그 순간순간을 돌이켜 보면 너무나도 행복했던 시간인 거야.”
지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아줌마한텐 늘 고마워하고 있어. 내가 이렇게 설 수 있었던 것도 아줌마 덕분이니까. 그래서 아줌마를 동경해 왔어. 그 동경이 날 여기까지 오게 했고. 그동안 나, 조금은 도움이 됐지?”
조금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꾸려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는 지은의 얼굴이 밝았다.
수년이 흐르고 나서야 해진은 지은에게 지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것도 명료한 사실만 겉핥기식으로 듣는데.
해진이 가벼워진 분위기를 이어가려는 듯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도움 안 됐는데?! 짐인데, 짐!”
“뭐?! 내가 뭘 잘못했다고 짐이래! 내가 해결한 사건만 일곱 건이 넘어요! 무, 물론 그 바탕엔 아줌마의 프로파일링이 들어간 게 몇 개 있었지만. 그건! 어! 언제까지나, 그래! 파트너적인 입장에서 해줘야 하는 거였잖아!”
“하여튼 말은 참 잘해. 내가 잘 키웠어. 그렇지, 딸?”
해진은 처음으로 지은을 '딸'이라고 불러보았다.
형성된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지은을 딸이라는 호칭으로 부를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그동안 너무 조심스러워서 입에 담지도 못했던 호칭.
해진은 지은이 '뭐래.'라는 말 같은 것으로 넘겨버릴 줄 알았다.
그런데 지은이 ‘응.’이라고 대답하더라.
그 뒤에 해진이 듣고 싶어 했지만 내색하진 않았던 ‘엄마’라는 말도 어렵사리 붙여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지은의 낯빛이 잿빛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강제적으로 흘러들어오는 장면들을 부정하듯 눈을 감아야 했다.
“지은아? 지은아?”
해진의 애타는 부름에도 그녀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해진은 결국 지은을 병원으로 데려가야 했다.
응급실에 도착해 빈 침대에 누인 지은의 상태를 확인해 본 의사는 잠시 기절한 것 같다며 외상도 없는 것 같으니 깨어나서 아픈 곳이 없다면 가도 된다고 했다.
해진은 짙은 한숨을 내뱉으며 간이 의자에 앉았다.
“하…….”
그의 한숨에 ‘안도감’이 섞이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지은이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사실만 놓고 봤을 땐 다행이었지만, 지은을 이렇게 만든 원인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길이 없기 때문이었다.
해진이 고개를 푹 숙이고 좌절하고 있을 때 머릿속을 스치는 조금 전 상황.
지은이 쓰러지기 전 했던 말.
엄마.
분명 엄마라고 했다.
순간 해진은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지은이 고통스러워하며 뒤로 넘어가는 바람에 그 미소가 오래가진 못했다.
지은이 이렇게 된 데에는 ‘엄마’와 관련이 있었다.
해진은 생각했다.
지은을 쓰러지게 했던 원인을 찾기 위해선 지은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기억하는 이들을 만나야 한다고.
하지만 그가 불러낸다고 해서 마술사 비둘기처럼 뿅 하고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설령 그렇게 나올 수 있다고 해도 이제까지 드러난 성격으로 봤을 때 호락호락하게 협조할 녀석들도 아니었다.
해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지은이 느릿하게 눈꺼풀을 올렸다. 지은은 해진을 불러 자신이 깨어났다는 것을 알리지 않았다.
해진을 보지도 않고 그저 눈을 뜬 그 상태 그대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그렇게 몇 분.
해진이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야 비로소 지은이 깨어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은아, 괜찮아. 나 누군지 알겠어?”
지은의 볼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그런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설마. 뭔가 이상이라도 생긴 건가.’
해진은 불안해져서 의사를 불러오려고 했다.
그때 지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에 가자. 아줌마, 집에 가자.”
집에 가자는 지은의 탁한 목소리가.
“괜찮냐고 물었을 때 왜 대답 안 했어? 진짜 놀랐잖아.”
“그냥. 그냥…….”
지은은 애매한 대답을 하고는 침대를 벗어나 먼저 응급실을 벗어나려는 걸음을 뗐다.
집에 돌아오니, 당연하게도 식어버린 늦은 점심이 놓인 식탁이 보였다.
지은은 이를 바라보고 있다가 방으로 쌩하니 들어가 버렸다.
해진이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곧 식탁을 치우기 시작했다.
마지막 그릇까지 깨끗하게 씻은 뒤에 해진은 서재로 들어가 블랙보드를 덮었던 천을 걷어냈다.
빼곡하게 쓰인 정보들이 해진의 눈에 들어왔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
공식적으로는 원인불명이라고 나와 있지만, 대게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계기가 되었으니 지은도 비슷한 케이스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이리 머리 아프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해진은 블랙보드 앞에서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