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인문학 북클럽
나는 책과 가까운 사람이 아니다.
지금의 나의 이미지를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많이 나오는 이미지 또는 단어는 책이었다. 참으로 부끄럽다. 누군가 "이제까지 읽은 책 중에 제일 좋았던 책은 뭐야?"라고 물으면 난 기억나는 책이 딱히 없어서 부끄럽고 당황스럽다. 읽은 책이 별로 없고 크게 감동적인 책도 없었기에. 영화나 드라마라면 모를까. 책은 나에게 점수를 내기 위한 수단으로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책을 가까이한다는 것, 내가 원하는 책을 스스로 골라서 읽는다는 것, 책과 대화를 한다는 것, 책에서 질문을 만들어 낸다는 것, 책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 책으로 다른 사람과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잘 몰랐다. 나이 40이 되기까지.
북클럽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내가 인스타에 올린 그림들을 보고 '인친님'의 추천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인스타 사진이 정방형이라는 것도 몰라서 화가들의 대작들을 잘려서 올리곤 했던 인스타 왕초보 시절, 그저 내가 보고 싶은 그림과 설명을 저장해 보고자 하는 소박한 욕심으로 시작된 나의 첫 SNS. 그곳에서는 누군가 소통하고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것이 왠지 시간낭비로 느껴지는 게 내 솔직한 마음이었다.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친구와도 관계 맺기가 바쁜데 자그마한 스마트폰에서 사람들과의 채팅이라니.
그런 디지털 신생아였던 나에게 따뜻하게 먼저 말을 걸어왔던 사람이 있었다. 자신을 오지랖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지만, 그 마음에는 사람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 그리고 따뜻함이 묻어났다.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좋아하는 것, 관심분야도 겹치는 게 많아서 "어머, 어머"하며 물개박수치며 나를 설레게 했던 사람이었다. 심지어 같은 미국 땅, 그것도 동부, 같은 시간대를 살고 있는 분! 당시 코비드로 단절되어 있던 나의 인간관계에 작은 불씨가 켜졌다. 그분의 SNS 이름은 "실천하는 여자".
그분께서 전화 통화 중에, 부드러운 음성으로 "또띠아님은 이미 준비가 되셨어요"라고 말씀해 주셨던 기억이 난다. 북클럽에 대한 그 제안은 여름휴가 기간 내내 나의 마음을 흔들었다. 당시에 난 미국 땅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간절했었고, 어떻게든 독립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 자격증에도 도전했었다. 해외에서 아이를 키우는 평범한 엄마이지만 나에게 맞는 일이 무얼까 생각이 많았었고, 지인분들로부터 같이 비즈니스를 해보자는 제안에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 무엇도 내 마음을 '설레게' 하지는 않았다. 당시 자격증의 합격 소식보다도, 내가 좋아하는 분야의 북클럽을 진행해보고 싶은 설렘이 더 크게 느껴졌다. 시작도 안 했는데 떨리고 긴장되었고, 이건 내 마음이 시키는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살면서 이렇게 강한 시그널은 처음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시작된 <그림 인문학> 북클럽. 한국에서 윤리교사였던 나는 휴직한 지가 10년이었고, 더군다나 아이들이 아닌 성인을 대상으로 북클럽을 해 본 적도 처음이었다. 누군가 앞에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늘 긴장되는 사람이고 주목받는 것이 싫은 나인데, 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분야의 공부를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과 모여서 꾸준히 책을 읽고 싶었을 뿐이었다. 사는 것에 밀려서 책 읽는 것이 매번 뒤로 밀리는 나의 일상에 변화를 주고 싶기도 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공부가 아닌 내가 선택한 나의 첫 공부. 첫 북클럽.
해외에서 연년생 아이 둘을 키우면서 '나를 위한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어려웠는데, 막내 아이가 하루 3시간씩 널서리를 처음 가게 되었던 그때 처음으로 미술사 수업을 찾아들었다. 공부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가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나에게 선물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휴직하고 4년 만에 처음 연필을 들었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시간을 쪼개서 배우고 싶은 분야가 그림 공부였다는 것을 북클럽을 통해 상기시켜 보았다. 그림은 못 그리지만 작품들 감상은 어찌 그리 좋았는지.
꽤 오랫동안 미술사 수업을 들었기 때문에 미술용어나 흐름이 낯설지는 않았지만, 머릿속에는 항상 좀 더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다는 목마름이 있었다. 북클럽은 수업을 듣기만 했던 수동적인 자세에서 한 걸음 나아가 관련 책을 찾아 읽고 다른 사람들과의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적극적인 미술 사랑의 방법이었다.
인문학의 꽃이라고 불리는 미술사. 미술사를 공부하다 보면, 친숙한 시대별 미술 작품을 통해 그 이면의 세계(철학, 역사, 문학 등)에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림 하나에 담긴 이야기를 좀 더 깊이 공부하고 바라보면 그 시대가 보인다. 그림을 통해 깨닫게 되는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전공과도 무관하지 않게, 아니 오히려 더 강력하게 연결될 수 있겠다는 기대감도 북클럽을 시작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즉각 실행에 옮기는 행동파는 아니다. 고민하다 힘이 빠지는 게으른 (불)완벽주의 형의 인간이다. 그런데 Zoom 사용도 몰랐던 내가 온라인 북클럽을 시작하게 되고, 1년 넘게 운영하다 보니 북클럽으로 인해 나는 많이 성장하고 변화하고 있다. 교육 공무원으로 10년 넘게 일하며, 주어진 일에 성실하게는 살아왔으나 가슴이 떨리는 일도, 일을 벌이고 싶은 마음도 없이 건조하게 살아왔었다. 북클럽을 통해 작은 규모이지만 주도적으로 리더가 되어보는 경험, 콘텐츠를 기획하고 실행해 보는 이 경험들은 나를 좀 더 능동적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애정 하는 첫 북클럽이다 보니 시간을 많이 쏟게 되는 건 당연한 일. 가족들이 뭘 그렇게 열심히 하냐고 물어보는데 내가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좋으니까"라는 말 말고는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누구에게라도 꼭 "일" 벌려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소소한 것 하나를 더욱 깊게 사랑하는 일이 될 수 있다고. 그것으로 맺게 된 사람들과의 관계는 더없이 소중하다고. 그로 인해 내 삶이 풍성해지고 설렌다고. 그게 무엇이든 좋으니 행동파 대장처럼 당장 시작해 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