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생활 일상
외국생활 11년 차. 어떤 음식이라도 뚝딱 잘 만들어 먹을 것 같은 경력이지만 외국 산다고 다 영어가 유창한 것이 아니듯(매우 찔림), 주부 생활을 오래 했다고 음식을 그만큼 잘하는 것도 아니란 걸 누구나 안다. 해외에서 한국 음식은 고급스럽고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라 연년생 꼬맹이들 엄마였던 나는 국, 반찬, 밥으로 차려진 한식보다는 한 그릇으로 해결되는 음식을 주로 해서 먹었다. 그랬기에 파스타와 소스만 있으면 거의 라면 수준에 가까울 정도로 쉬운 파스타 요리는 인기 단골 메뉴였다. 시판 소스를 사서 먹기도, 만들어서 먹기도 하면서 어느 정도 음식에 자신감이 붙을 즈음 마지막 단계의 파스타 요리는 라자냐였다.
라자냐는 가장 사이즈가 큰 이탈리아의 파스타의 한 종류이다. 파스타 하면 스파게티 면만 생각하기 쉬운데, 국수 모양(스파게티) 뿐 아니라 짧은 빨대 모양(펜네), 곱슬머리 같은 모양(푸실리), 만두 모양(라비올리)등 모양도 맛도 다양하다. 파스타 면 하나가 나의 손바닥 크기만 한 라자냐는 요리방법도 다른 파스타와는 다르다.
보통 삶아서 소스에 버무리는 간단한 파스타와는 달리 라자냐는 준비과정과 요리되는 시간이 좀 더 요구된다. 사이즈가 크다 보니 익히는 시간이 좀 더 오래 걸리기도 하고, 오븐에서 익히기 전 재료들을 순서대로 쌓아야 하는 사전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라자냐 파스타 시트, 베사멜 소스, 라구 소스(고기 들어간 토마토소스)의 순서로 칸칸이 쌓고 마지막 꼭대기에서 파마산 치즈와 모짜렐라 치즈를 뿌린 뒤 오븐에서 노릇하게 40분 정도 굽는다. 보통 이런 방식이지만, 3종류의 레이어를 자신이 원하는 재료로 대체할 수 있어 각자의 스타일대로 자신만의 라자냐를 만들 수 있다.
각 가정마다 만두나 김치를 만드는 방법이 다양하듯, 우리 집 라자냐 만드는 방법도 전통적인 방법과는 조금 다르다. 베사멜 소스 대신 리코타 치즈와 우유를, 라구 소스 대신에 심플한 토마토소스(마리나라 시판용)로 대신한다. 건강을 생각해서 밀가루인 라자냐 시트가 아닌 가지나 호박을 슬라이스 해서 만들어 본 라자냐는 나만 좋아했던 관계로 우리 집 시그니처 메뉴로 등극하진 못했다.
아이들도 안다. 라자냐를 만드는 날은 누군가 우리 집에 초대되었다는 것을. 오븐을 오래 사용하는 음식이고 양을 많이 하다 보니 의례히 손님 초대 요리가 되어버린 라자냐. 치즈가 많이 들어간 고열량이라 자주 하긴 그렇지만 여러 가족과 함께 나누어서 먹기에도 좋고, 무엇보다 남녀노소 모두가 좋아하는 음식이라 내가 신뢰하는 음식이기도 하다.
파스타를 만들기 전에 준비할 것은. 먼저, 실온의 리코타 치즈에 파마산 치즈(짭조름한 치즈이기 때문에 심심한 리코타와 섞어줘야 간이 맞는다)와 소금 후추 그리고 우유를 첨가해 잘 믹스해 놓는다. 우유는 레이어 할 때 부드럽게 발릴 정도로만 조금 첨가해주면 된다.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땐 토마토소스를 직접 만든다. 생토마토와 캔 토마토를 섞어 이탈리안 허브를 넣고 뭉근히 끓여주는 간단한 과정이지만, 요즘엔 시판용 마리나라 소스를 더 애용한다. 귀차니즘으로 토마토 끓이는 작업은 패스하는 경우가 많고 시판용 토마토소스가 정성 들인 내 것보다 더 맛있다는 사실. 파스타는 건파스타 생파스타 상관없지만, 유통기한이 긴 건파스타를 많이 사용하게 된다.
명절에 만두 속만 준비해 놓으면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알아서 만두를 빚는 것처럼, 재료만 준비해 놓으면 아이들이 소매를 걷어 부치고 직사각형 오븐 용기에 파스타 탑을 쌓기 시작한다. 토마토소스 바닥에 깔고 파스타 면 올리고, 그 위에 리코타 치즈를 올린다. 같은 순서로 반복한다. 손님이 오시기 전 1시간 반 정도 전에 이 작업을 하기 시작하는데, 아이들이 파스타 탑을 쌓는 동안, 나는 라자냐와 어울리는 샐러드나 부르스케타를 준비한다. 보통은 콥 샐러드와 함께 먹을 때가 많기 때문에 재료를 다듬는 시간이 많이 걸리다 보니 이렇게 아이들과 분담하여 손님 준비를 함께 한다.
라자냐는 일단 오븐에 들어가면 마지막에 뜸 들이는 시간까지 거의 1시간가량을 익히는 슬로 푸드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 단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오븐 안에서 따뜻하게 대기하고 있는 음식 덕분에 호스트인 나는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가 있다. 보통은 따듯한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불을 쓰다 보면 난 거의 거울 한번 제대로 못 보고 정신없이 손님을 맞이하게 되고, 그들과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음식을 내오느라 바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도 동동거리지 않고 손님들과 함께 식사를 '즐기며' 먹고 싶다. 그러기엔 이만한 음식이 없다. 전원 버튼을 끈 오븐 속 라자냐는 덮어진 포일을 벗고 표면을 노릇이 만들며 생 바질로 멋을 내어 대기 상태로 있고, 손님들과 우리 부부는 식전 와인으로 간단하게 이야기 나누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여유 있게 음식을 천천히 낼 수 있어서, 그리고 아이들도 함께 준비할 수 있어서, 무엇보다 맛있어서 이만한 손님요리가 있을까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비주얼도 끝내준다.
미국에서 4번째 맞는 땡스기빙 데이가 코앞이다. 솔직히 미국의 명절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때때로 찾아오는 우리나라의 명절, 그리고 미국의 명절에 특별한 음식을 만들어 먹고 싶다. 외국에서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이 명절에 대한 추억 하나 없이 자라는 건 왠지 너무 삭막하다. 대단한 우리 집의 전통은 아니더라도, 때때로 찾아오는 설레어할 명절 음식 하나 정도는 만들고 싶다. 미국 땅에서 한국인이 이탈리아 요리를 만드는 라자냐 땡스기빙 데이를 계획해 봐야지. 우리끼리 맛있으면 그만이니까!
라자냐. 이름도 왠지 모를 부드러움과 고급스러움이 있는 요리.
사실 너무 쉬워서 요리랄 것도 없지만, 아이들과 함께 만들 수 있는 요리라는 것에 큰 점수를 주는 효자 음식이다. 손님들에게 "우리가 만들었어요"라고 말하면서 그다음의 칭찬을 기대했던 나의 꼬마 소녀들. 이제 할 수 있는 요리가 많아져서 라자냐는 큰 자랑거리가 아니지만 엄마와 함께 했던 요리로 마음속에 오래 남아있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