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봉사활동
9+1은 뉴욕 로드러너(NYRR)에서 주최하는 레이스 중 지정된 레이스 9개를 뛰고, 1번의 봉사활동을 하면 내년에 있을 뉴욕시티마라톤에서 뛸 수 있는 자격을 준다. 말하자면 2023년 뉴욕 마라톤에서 뛰고 싶다면 2022년 한 해 동안 9+1을 준비한 사람은 참가 자격을 먼저 받게 되는 것이다. 뉴욕시티마라톤은 세계 6대 마라톤대회 중 하나로 신청자 수가 많기 때문에 신청한다고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주 운이 좋아서 당첨이 될 수도 있지만 확률이 매우 희박한 편이고, 도네이션으로 출전권을 얻는 방법은 부담스럽다. 때문에 근처에 사는 러너들에게 이 프로그램은 뉴욕 마라톤을 뛸 수 자격이 주어짐과 동시에 1년에 걸쳐 뉴욕에서의 달리기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https://www.nyrr.org/?gclid=CjwKCAiA68ebBhB-EiwALVC-NqFknGEA9xI1ItwMqnh4-IDGu6kqZWng5z60b0EAcJbj1LxyNNRBGBoCp3gQAvD_BwE
2023년 마라톤대회를 위한 우리 부부의 프로젝트는 그렇게 해서 시작되었고, 9번의 달리기를 계획했다. 마지막 한 번의 봉사활동은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중 1년 후 뛰게 될 뉴욕시티마라톤 대회를 예습한다는 생각으로 신청했다. 참가자들만 5만 명, 대회 관계자, 경찰, 구급대, 방송사까지 엄청난 규모의 대회이다. 나는 참가자가 아닌, 초록색 바바리를 입은 자원봉사자!
내게 주어진 일은 러너들이 입다가 놓고 간 옷들을 도네이션 수거함에 넣는 일(clothing collection)이다. 매년 서머타임이 끝나는 11월 첫째 주 일요일에 치러지는 뉴욕시티마라톤 대회. 겨울이 시작되는 11월이기 때문에 새벽에 나와서 대기하는 선수들은 추위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만한 따뜻한 옷이 필요하다. 달리는 동안에는 최대한 가벼운 복장이어야 하기 때문에 달리기 직전에 옷을 벗어 놓고 경기를 시작한다. '놓고 간 옷들을 경기가 다시 끝나고 돌아와서 찾으면 안 되는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일단 시작과 마지막이 같은 장소가 아니고, 5만 명이나 되는 사람의 소지품을 관리하는 것이 규모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쉽지가 않다.
그렇기에 대부분 선수들은 대회복 위에 도네이션 할 만한 옷을 겉에 입는다. 요즘 옷들이야 워낙 질이 좋아서 낡아서 버리는 옷들은 거의 없다. 그렇다 보니 러너들이 놓고 가는 옷들은 버리기 아까운 '멀쩡'한 옷들이다. 그래서 대회 측에서는 그 옷들을 모아 자선단체에 기부를 한다.
새벽 6시에 자원봉사자들은 출석체크를 하고 녹색 점퍼와 목걸이를 받는다. 같은 분야의 일을 지원한 사람들끼리 모여 주의사항을 듣고 각 Village 별로 배치가 된다. 3개의 빌리지가 있는데 나와 남편은 Green Village. 색깔로 구분되는 village 3개 그 안에 시간대별로 다르게 출발하는 wave 다섯 그룹. 이 많은 인파는 자신이 받은 빕에 표시된 색깔과 출발시간을 기억하고 정해진 곳에서(물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 대회를 기다린다. 일반 러너들이 처음 출발하는 wave 1 그룹은 9시 10분. 출발까지 선수들은 몸을 따뜻이 해야 하기 때문에 수거할 옷이 나오지 않아 3시간 정도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덕분에 행사장 이곳저곳을 구경할 수 있었고, 대회에서 준비해준 던킨 커피와 베이글, 에너지 바를 배부르게 먹으면서 여유 있게 대회를 관망할 수 있었다.
세계 각지에서 모인 러너들이다 보니, 나라별 국기들도 눈에 많이 들어온다. 국기를 옷에 달고 국가대표인 듯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듯한 러너들을 볼 때면, 마음속으로 무한 응원을 하게 된다. 특히나 태극기를 달고 계신 분들을 볼 때면 더욱. 한국 과천 마라톤 동호회에서 나오신 (묻지 않아도 옷에 새겨져 있었다) 중년의 아저씨 한 분은 한글로 된 이름 석자를 옷에 박아 입고 나오셨다. 분명 완주하셨으리라^^
자원봉사 옷을 입고 있는 나로서는 특별히 할 일이 없어도 앉아서 쉴 수는 없다. 나와 남편은 빌리지 안을 반복적으로 돌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러너들이 시작 전 사진을 남기는 일을 도왔다. 수줍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는 러너들. 기억에 남았던 네덜란드 아버지와 아들. 그 흔한 스마트폰이 아닌 디지털카메라로 오늘을 추억하는 사진을 찍는 아버지. 대회가 시작되는 베라자노 다리를 배경으로 멋쩍게 웃으며 미소를 짓는 아들. 눈이 마주치자 유럽 사람 특유의 눈썹 웃음을 보낸다. 나는 부상 없이 완주하라는 마음으로 엄지척을 날렸다.
당일날엔 백체크(짐을 미리 맡아 두는 곳)가 따로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가져온 짐들은 도네이션 되거나 버려지고, 핸드폰 정도만 몸에 지닌 채 출발한다. 내년에 이 자리에 있을 나를 상상하면서 마라토너들을 바라본다. 결전을 앞둔 마라토너 군상! 뛰기 직전까지 몸이 편안해야 하기에 많이들 누워 계신다. 제일 흔하게 사용되는 것은 바닥에 까는 담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것은 물놀이장에서 사용되는 튜브, 그리고 압권은 최고급 공기 침대. 물론 대회가 끝나면 모두 쓰레기장으로 갈 것인데 이렇게 큰 걸 가져와서 누워있는 러너들의 모습에서 또 다른 열정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 선수가 떠난 뒤 남기고 간 공기 침대는 또 누군가의 완벽한 기다림의 장소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래도 대부분 조용히 앉아서 음악을 듣거나 책을 보는 사람들이 많다. 잡지책과 버릴만한 책(책을 들고뛸 수는 없기 때문에)을 들고 와서 다 보고는 옆 사람들에게 넘겨준다. 자신의 출발 시간이 가까이 온 러너들은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한쪽 거리에서는 몸풀기 달리기를 한다.
에너지 공급
물, 게토레이, 커피, 베이글, 에너지바 이렇게 다섯 개의 부스는 러너들에게 필요한 에너지 공급을 담당한다. 작년 첫 마라톤이었던 나는 새로운 것을 먹으면 탈이 날까 봐, '안 하던 짓 하면 안 된다'는 선배 러너들의 충고를 듣고 물 이외에는 대회에서 준비해주는 것들은 입에 대지 않았었다. 하지만 보통은 3시간 이상을 달려야 하는 체력전인데 대회 전 아무것도 먹지 않을 수는 없다. 기다리는 시간까지 합치면 5시간 이상의 시간. 달리는 동안 탄수화물에서 에너지원을 공급받기 때문에 보통 시작 전 베이글로 몸을 준비시켜 놓는다. 크림치즈 없는 플레인 베이글과 시나몬 베이글이 무슨 맛이 있을까 싶냐만은 뉴욕 베이글이지 않은가. 빵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맛있다. 베이글과 함께 SIS 에너지바, 던킨 커피 등은 축제의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넉넉히 제공되고 있었다.
메디컬 센터
빌리지마다 의료를 담당하는 메디컬 센터가 있는데,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선수들이 뛰기 전에 몸에다 열심히 뭔가를 바르는 게 있길래 눈여겨보았더니 바셀린이었다. 메디컬 룸에 가면 큰 바셀린 통에 막대기를 꽂아놓고 원하는 사람에게 바셀린을 막대기에 묻혀서 퍼주고 있었다. 러너들은 뛰는 동안 살끼리 맞닿아서 쓸릴 수 있는 부분에 바셀린을 정성스럽게 발랐다. 겨드랑이나 사타구니 그리고 남자들은 젖꼭지에. 옷에 한번 쓸리기 시작하면 몇 시간 내내 땀으로 인해 쓰라릴 것이니 이해가 되었다. 바셀린을 바른 다는 것. 또 하나 배웠다.
도그 테라피
풀 마라톤의 거리가 취미로 뛸 정도인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에 대부분 얼마 이상의 기간 동안 나름대로의 준비를 해왔을 것이다. 그렇다 보니 마라톤 대회는 달리기 축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심리적으로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긴장되는 러너들을 위한 '강아지 테라피'를 대회에서 준비해주고 있었다. 긴장한 러너들이 경기 전에 강아지들과 교감하면서 편안한 마음을 갖게 하는 곳인 것이다. 그린 빌리지에 있는 강아지 3마리. 러너들은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부스에 들어오면 친절한 강아지 3마리를 만날 수 있다. 쓰다듬고 만져주자 더없이 좋아하는 '매우' 사교적인 강아지들이다. 마음의 편안함을 주는 동물들. 또 강아지들을 예뻐하는 사람들. 아마도 빌리지에서 제일 바쁜 부스가 아닐까 싶다.
원초적인 욕구를 해결해주는 곳, 화장실
우리나라 JTBC마라톤이 다 좋았는데 화장실이 부족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도 어느 대회를 나가든지 화장실을 자주 가는 것 때문에 이 부분에 매우 민감하다. 이렇게 큰 대회가 화장실을 어떻게 다 수용할 수 있을는지 걱정스럽기도 궁금하기도 했는데, 다행히 각 빌리지마다 오래 기다리지 않고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여유 있는 편이었다. 마라톤 시작 전 화장실 의식은 그날의 경기에 가장 중요한 사전 의식이라는 것을 러너들은 모두 이해한다. 시작 전 반가운 신호가 함께 하길.
오전 11시 30분, 마지막 wave5 러너들이 출발대에 섰다. 예년과는 다르게 11월 초의 날씨라고 하기엔 비정상적으로 따뜻한 날씨. 섭씨 20도가 넘어가고 해가 중천에 떠있는 시각에 출발한 마지막 러너들. 가는 길이 얼마나 힘들지 눈에 선하지만, 센트럴파크의 마지막 피니시 라인까지 모두가 완주하기를 바란다. 힘든 길이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의미 있는 경험이란 것은 분명하니까. 이제 빌리지 안에는 남아있는 선수들이 없다. 사람들이 모두 빠진 자리에서 자원봉사자들은 나머지 정리를 한다. 버려진 담요나 옷을 주워서 도네이션 박스에 담고, 청소를 하는 자원봉사자도 따로 있었지만 일을 가리지 않고 함께 치웠다.
대회용 신발과 연습용 신발이 달라서 멀쩡하지만 버려진 신발도 눈에 많이 띈다. 그들이 마지막에 남기고 간 다양한 물건들, 간혹 맘에 드는 후드들이 있어 물욕이 일기도 했지만 좋은 의미로 도네이션 하는 것이니 예쁘게 박스 안으로 넣는다. 내년에는 봉사자가 아닌 러너로서 세계인의 달리기 축제를 무사히 즐길 수 있길 바란다. 굿럭 또띠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