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마라톤 준비
학교 다닐 때부터 운동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단거리 달리기처럼 속도를 다투는 운동은 물론 운동 센스를 요하는 공놀이까지 뭐 하나 평균 이상 하는 게 없었다. 뜀틀, 멀리뛰기, 팔 굽혀 펴기, 매달리기, 배구, 피구 등 체육 시간에 하는 대부분 운동에 늘 수준 미달이었다. 일찌감치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니 포기하고 있었던 운동의 세계. 그러다 보니 남들 앞에서 뚱그적 운동하는 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나에게는 '수치심'이었다.
운동과 함께 내 몸에 대한 자신감도 바닥이었던 나는 무릎 위로 올라간 반바지는 평생 입어본 적도 없고 늘 긴바지, 긴치마였더랬다. 물렁물렁 나의 다리는 햇빛 한번 제대로 쬐어 보지 못한 하얀 순두부가 되어 갔고, '나는 운동해도 땀이 잘 안나는 특이체질이야'라는 망상에 가까운 내 생각을 오랫동안 굳게 믿었었다. 몸을 움직여 땀을 낸다는, 그 단순한 원리를 초등학생도 다 아는 그 진리를 내가 못한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나는 애써 부정했다.
마흔 살에 시작한 달리기. 달리기 취미가 생긴 나는,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그동안 운동에 대한 천지 한을 풀듯 참 열심히도 달렸다. 매일을. 해묵은 땀구멍들이 이제야 숨 좀 쉬겠다는 듯이 뛸 때마다 묵은 땀을 쏟아내며 온 몸을 적시면 '그래 이 맛이지'라고 중얼거린다. 이럴 땐 마치 운동중독인 것처럼 느껴지는 내가 참 좋았다.
매일 달리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새로운 이벤트를 추가하고 싶었다. 좋아하다 보면 도전해보고 싶은 건 자연스러운 이치인가? 비공식 하프마라톤 이후 달리기에 자신감이 붙어서인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풀 마라톤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매일 조금씩 연습하면 왜 못해?' 운동으로 창피했던 지난날에 대한 보상 심리와 오기가 작동했다.
풀 마라톤을 완주하는 것, 해 보고 싶었다. 나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달리기만큼 정직한 운동은 없으니까. 대단한 재능이 없더라도, 비루한 몸일지라도 매일 노력하면 그만큼의 보상을 반드시 주는 운동이니까. 달리기가 내게 운명처럼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11월 필라델피아 풀 마라톤을 앞두고, 대회에서 제공하는 100일 훈련 스케줄을 식탁 앞에 붙였다. 스케줄을 훑어보는 순간 이것이 가능할까라고 생각이 들며 겁부터 더럭 났다. 일단 시작은 해보자라는 마음. 뒷일은 생각지 않고 주어진 계획을 내 몸에 맞게 천천히 따라가 보기만이라도 해보자라는 심정으로 3개월 작전에 돌입했다. 훈련을 막상 시작하니 일주일에 한 번 롱런을 하는 것만 제외하고는 그동안 내가 뛰어 왔었던 거리이기 때문에 아주 무리가 되는 스케줄은 아니었다. 나의 몸을 '마라톤 완주'라는 목표에 맞추어 단련시킨다는 것. 운동선수가 아닌 이상 해보지 못했을 새로운 세계의 경험이었다.
롱런하는 일요일. 이번 주 일요일은 지난주 보다 조금 더 긴 거리를, 다음 주에는 이번 주 보다 조금 더 긴 거리를 달려서 그 거리를 내 몸이 기억하게 한다. 하프(13.1마일) 마라톤도 간신히 뛰었는데, 26.2마일의 풀 마라톤이 가능할까, 훈련을 열심히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거리가 주는 압박에 주눅이 들게 된다. 그래도 한꺼번에 많은 거리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매주 조금씩 늘려 나가는 훈련이었기 때문에, 처음의 부담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뎌지며 매일의 미션을 완수할 때마다 자신감도 붙게 되었다.
장거리 달리기를 한 뒤 찾아오는 묵직한 근육통이 훈장처럼 몸에 붙어서 내가 달린 그 거리를 몸으로 기억해 준다. 대회 당일만 생각하면 긴장도 되지만, 내 몸을 아낌없이 써 보는 이 귀한 경험들이 꾸준히 내 몸에 익숙해지면서 달리기 근육처럼 내 마음도 단단해진다. 훈련하는 기간 동안 연습과 비례하는 진실된 내 몸이 신기하면서도 기특했다.
스케줄에 나온 대로 달리기 캘린더에 X표를 하면서 계획된 훈련의 시간들이 쌓이고 모이면서, 매일의 작은 승리들이 줄을 서서 대회를 기다렸다. 달리기 앱에서 내가 연습한 시간들과 거리들을 막대그래프로 확인하면서, 다음 날 막대기 하나를 더 채워 넣을 생각에 뿌듯하며 설레었다.
마라톤 완주의 큰 기쁨도 내게는 잊을 수 없는 자부심이지만, 그것을 준비하는 동안 꾸준하게 지켰던 훈련기간을 난 더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다. 내가 만약 완주를 하지 못했더라도 절대로 실패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마라톤 준비를 하면서 보낸 모든 경험들이 나를 성장시킨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에. 마라톤 준비 훈련을 하면서 나도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존재'이구나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나를 믿게 해 준 달리기.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오기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해 준 달리기.
다리가 천근보다 더 무겁게 느껴져도 다치지 않고 버텨준 나의 몸에 감사했고,
나와의 약속을 지킨 것에 스스로 칭찬하면서 나를 다독였던 그 순간들이 나를 지치지 않게 해 주었다.
내가 스스로 빛을 낼 수 있게 해 준, 그 빛을 발견하게 해 준 달리기.
"진심으로 간절히 원하는 게 있으면 계획을 세워서 매일 조금씩 해! 너 해봤잖아! 넌 원하면 꼭 이룰 수 있는 사람이야!"라고. 온몸으로 나에게 믿음과 확신을 주었던 훈련의 시간들. 평생 잊을 수 없는 사건으로 기억될 나의 마라톤 이야기다. 고통이 아닌 즐거움으로 하루하루를 충만히 채울 수 있었던 시간들에 감사하며,
오늘도 나는 달리기로 나를 채워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