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딘스키, 여러 개의 원
학교 다니면서 시험 볼 때 가장 싫었던 객관식 문항의 보기는 ‘정답 없음'이었어요. 5번 보기에 '정답 없음'이 나오면 보기 1번부터 다시 읽게 되어 시간을 잡아먹고는 했었지요. 이 복잡한 세상에는 정답과 오답으로 간단히 나눌 수 없는 문제들도 많은데 오랫동안 우리는 정답을 맞히는 것에 아주 잘 길들여져 왔어요. 왜 정답인지, 오답은 왜 정답이 될 수 없는지 특별히 따져 묻지 않았어요.
미술에서도 마찬가지로 아주 오랫동안 정답이라고 여겨졌던 것이 있어요. 전통적으로 '그림'은 어떤 구체적인 형상을 묘사하는 것을 의미했어요. 어디에 그릴 것인지, 어떻게 그릴 것인지는 조금씩 다를 수 있었지만 형태가 있는 무엇인가를 나타내는 것이 그림 그리기의 기본이었지요. 아주 오랜 기간 동안요.
그러던 1909년 어느 날. 정답으로 여겨졌던 전통을 깬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러시아출신이자 추상회화의 창시자로 알려진 칸딘스키(1866~1944)입니다. 칸딘스키의 추상은 한 사건으로 탄생해요. 외출하고 자신의 화실로 돌아온 칸딘스키는 자신의 화실에서 너무도 아름다운 그림을 한 점 발견해요. 캔버스에 색채가 풍성하게 자욱하다는 느낌 이외에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는 그림. 가까이 다가가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작업 중이던 자신의 그림이었어요. 똑바로 걸리지 않고 옆으로 뉘어 놓은 자신의 그림. 이 사건은 칸딘스키에게 큰 영감을 줍니다. 회화에서 사물의 형태를 '구상'해서 표현해 왔던 정답의 세계에 의문을 가져요.
무엇인가를 묘사해야지만 그림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데 왜 다른 대상이 필요한가?
그는 귀로는 전달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음'으로 작곡을 하듯, 캔버스에 형태와 색이라는 음표로 작품을 구성하고 싶었어요. 이제까지 없었던 추상회화의 개념을 칸딘스키가 깨달았던 순간이에요. 그로 인해 추상화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지요.
칸딘스키의 작품 중 <여러 개의 원>이라는 작품을 함께 볼까요? 칸딘스키 그림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원. 시작과 끝의 구분이 없는 원은 영원함을 상징해요. 어둠 속 단단히 자리를 지키며 자신의 색을 내고 있는 이 원들은 무엇처럼 보이세요? 크기도 제각각이에요. 마치 우주 속 별자리를 나타내는 것처럼 느껴져요. 여러 개의 원이 겹쳐 있기도 하고 혼자 멀리 떨어져 있는 원도 있어요. 가장 큰 푸른색 원은 특이하게 하얀 테두리가 둘러져 있고, 그 테두리는 경계가 불분명해요. 마치 푸른 원이 더 커질 수 있도록 자리를 넓히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깊이감이 느껴져 빨려 들어갈 것 같기도 해요.
칸딘스키는 이 그림을 그리면서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지금 이 그림을 보는 나의 마음은 어떤가요? 어둠 속에서 예쁘게 빛나는 원들을 보면, 저는 제 안에 숨어있는 여러 가지 꿈을 떠올립니다. 작은 꿈이든 큰 꿈이든 내 안에서 각자 색깔을 내면서 커지고 작아지고를 반복하고 있는 꿈들을요. 현재 가장 간절한 꿈은 무엇인가. 그 꿈과 맞물려 함께 가야 하는 꿈들은 무엇일까. 푸른 원처럼 나의 꿈은 지금 확장되고 있는가. 변두리에서 조금씩 꿈틀거리는 작은 꿈은 무엇인가 등을 생각하면서요.
꿈의 지도를 살피며 스스로 물어봅니다. 작은 꿈이 커져서 큰 꿈으로 향하고 있는지를. 매일 지키고자 하는 작은 루틴들은 나의 꿈의 방향과 궤를 같이 하고 있는지를요. 새벽기상과 독서, 가족들의 식사 챙김, 누군가를 위한 1분 기도, 감사일기 3줄, 산책, 대화.. 매일 나에게 일어나는 짧고 사소한 이 모든 일들이 꿈의 지도 안에서 바쁘게 움직여요. 나답게 살고 싶은 꿈을 향해서요.
커피를 마시며 그림을 멍하니 들여다봐요. 그날의 기분에 따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해석의 자율권을 주는 추상화. 정답은 없어요. 내가 느끼는 감정이 옳은 것이니까요. 어떤 날은 제 꿈에 대해, 또 어떤 날은 가족들의 꿈에 대해 궁금해하기도 해요. 그리고 소망해요. 그림 속 모든 원이 하나의 별자리처럼 이어져 아름답게 빛나듯, 나와 가족들의 꿈도 함께 빛나기를요.
Vassily Kandinsky, Circles in a Circle, 1923, Philadelphia Museum of Art
Vasily Kandinsky, Around the Circle, 1940, Guggenheim
#꿈 #추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