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셰프

- 튜브 고추장

by 한병철 Mikhail K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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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시청률이 급등하고 있는 TV드라마 '폭군의 셰프'는 2025년 8월 23일부터 방영 중인 tvN 주말 드라마로, 웹소설 '연산군의 셰프로 살아남기'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은 프랑스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의 헤드 셰프인 '연지영'인데, 소녀시대의 영원한 센터인 임윤아가 열연하고 있다. 그녀는 요리 경연대회에서 우승하며 성공 가도를 달리던 중,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조선 시대로 타임슬립하게 된다. 그곳에서 연지영은 최고의 미식가이지만 동시에 폭군으로 알려진 가상의 왕 '이헌'을 만나게 된다. 극중의 폭군인 연희군 이헌은 조선 역사속의 연산군을 가리킨다.


드라마는 지영이 현대적인 요리 기술과 지식을 활용하여 폭군의 입맛을 사로잡고, 궁중의 복잡한 암투 속에서 살아남는 과정을 서바이벌 판타지 로맨스 코미디 형식으로 풀어내고 있는데, 소녀시대 임윤아의 맛깔스런 연기가 돋보인다.


이 드라마 1편에서는 ‘고추장 버터 비빔밥’이 등장하는데, 우리에게는 친숙한 이 음식을 처음 맛본 임금 연희군과 서민소녀 서길금이 맵다면서 손사래를 치는 광경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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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에서는 이 부분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지 않는다.

연산군과 서길금이 몹시 매워하는 이유는, 이 두사람이 고추장과 고춧가루를 평생 한번도 먹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반도에 고추가 들어온 것은 대충 16세기이고, 연산군의 즉위 시기는 15세기말이다.

연산군의 출생은 1476년 12월 2일 이고, 사망은 1506년 11월 30일 이니, 15세기말에 태어나 16세기초에 죽는다.


고추는 16세기말에서 17세기초에 한반도에 일본을 거쳐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14년에 발간된 조선시대 백과사전에 해당하는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남만초(고추)는 왜국(일본)에서 왔으며, 그 독이 매우 매워 음식에 섞어 먹을 수 없다’라고 적혀 있다. 당시 고추가 한반도에 상륙하기는 했으나, 아직 식용으로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략 18세기 즈음부터 고추는 한국인의 식탁에 오르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매운맛이라면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우리 한국인의 삶의 일부인 매운맛의 여정에 대해서 알아보자.




1. 붉은 맛의 대항해 : 고추, 동아시아의 미각을 뒤흔들다


우리의 식탁에서 김치가 사라지는 순간을 상상할 수 있는가. 얼큰한 찌개 없이 겨울을 나는 것은, 매콤한 닭갈비 없는 회식 자리는 또 어떠한가. 현대 한국인의 정체성과도 같은 ‘매운맛’의 상징, 고추가 사실은 임진왜란 즈음에야 한반도에 상륙한 ‘외래종’이라는 사실은 이제 꽤 널리 알려진 상식이다. 하지만 이 붉고 작은 열매가 어떤 경로를 거쳐 우리의 미각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는지, 그리고 비슷한 시기 중국 대륙에서는 어떤 거대한 미식 혁명을 일으켰는지 그 장대한 여정을 함께 따라가 보는 것은 여전히 흥미로운 일이다.


고추의 여정은 미각의 세계사, 즉 ‘콜럼버스의 교환(Columbian Exchange)’이라는 거대한 퍼즐의 한 조각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낯선 작물이 대항해 시대의 물결을 타고 구대륙으로 건너와 각 지역의 식문화와 만나 폭발적인 시너지를 일으킨 드라마틱한 과정이다. 특히 동아시아의 두 거인, 중국과 한국이 고추를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것으로 체화해 나간 과정은 놀랍도록 닮았으면서도 서로 다른 개성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2. 낯선 이방인, 장식품으로 머물다


고추의 원산지는 중앙아메리카 멕시코 고원 일대다. 15세기 말, 콜럼버스의 함대가 이 낯선 열매를 유럽에 전했고, 폭발적인 항해 기술의 발달과 함께 포르투갈과 스페인 상인들의 손을 거쳐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16세기 후반, 명나라 말기의 중국 남부 해안과 16세기 말~17세기 초 조선 땅에 고추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중국에 고추를 전파한 이들이 포르투갈 상인들이었다면, 한반도에는 일본을 통해 들어왔다는 것이 정설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조선의 추위를 이기기 위해 방한용으로 가져왔거나, 혹은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 들여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당시 일본에서는 고추를 ‘고려 후추’라는 뜻의 ‘고려호초(高麗胡椒)’라 불렀는데, 이는 일본 역시 한반도를 통해 고추를 처음 접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어떤 경로였든, 그 시작은 음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중국에서 고추가 ‘번초(番椒)’, 즉 ‘오랑캐의 후추’라 불리며 부유층 정원의 관상용 식물로 취급받았듯, 조선 땅에 들어온 고추 역시 처음에는 ‘남만초(南蠻椒)’ 혹은 ‘왜개자(倭芥子, 일본 겨자)’ 등으로 불리며 독초로 여겨졌다. 붉고 강렬한 색과 혀를 찌르는 자극적인 맛은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광사의 『동국악부(東國樂府)』에는 “술집 뜰에 심어놓고 붉은 꽃보다 곱다 하네”라는 구절이 등장하는데, 이는 고추가 식재료가 아닌 화초로 여겨졌던 당시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


3. 변방에서 중심으로 : 가난과 추위가 낳은 필연


해안가와 도성의 정원에서 수십 년간 낯선 이방인으로 머물던 고추가 어떻게 동아시아의 심장부로 파고들어 미각 혁명의 주역이 될 수 있었을까? 그 동력은 역설적이게도 ‘결핍’이었다.


중국에 고추가 처음 상륙한 시기는 16세기 후반, 명나라 말기로 추정된다. 당시 활발하게 해상 무역을 펼치던 포르투갈과 스페인 상인들이 주요 매개체였다. 이들은 동남아시아를 거쳐 중국 남부의 광둥(廣東), 푸젠(福建), 저장(浙江)과 같은 해안 항구 도시에 도착했다.


고추가 본격적으로 퍼져나간 경로는 양쯔강(揚子江)을 비롯한 강줄기를 따라서였다. 해안 지역에서 강을 통해 내륙으로 운송되면서, 고추는 중국 남서부의 깊은 산악 지대인 귀주(貴州), 후난(湖南), 사천(四川)에 닿게 된다.

이 지역들은 공통적으로 산이 많고, 습하며, 가난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중국 내륙, 특히 귀주(貴州), 후난(湖南), 사천(四川) 같은 남서부 산악 지대는 당시 중국에서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지역이었다. 산이 많고 습한 기후, 그리고 무엇보다 정부의 전매 품목으로 금값처럼 비쌌던 소금의 부족은 이 지역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했다.


바로 이때,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고추가 완벽한 대안으로 떠올랐다. 소금 없이도 밋밋한 옥수수죽을 넘길 수 있게 해주는 강렬한 풍미는 ‘가난한 자들의 향신료’로서 더할 나위 없었다. 또한 한의학 이론에 기반하여, 고추의 뜨거운 성질이 몸의 습기를 몰아낸다는 믿음은 건강을 지키는 약재로서의 가치까지 더해주었다.


한반도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국토는 피폐해졌고, 백성들의 삶은 극도로 곤궁해졌다. 소금과 장(醬) 같은 전통적인 조미료조차 구하기 힘든 상황에서, 고추는 훌륭한 구황작물이자 조미료였다. 특히 기존의 매운맛을 담당하던 천초(川椒)나 후추는 가격이 비싸 서민들이 쉽게 접하기 어려웠지만, 고추는 텃밭에서도 쉽게 재배할 수 있었다.


또한, 한국의 겨울은 중국 남서부의 습한 기후와는 또 다른 의미의 혹독함이었다. 매운 음식을 먹고 땀을 흘리며 추위를 이겨내는 경험은 고추가 단순한 맛을 넘어 생존의 지혜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18세기에 이르러 고추는 한반도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고,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는 김치 조리법에 고춧가루를 사용하는 방법이 최초로 기록되며, 고추가 비로소 우리의 음식 문화에 본격적으로 편입되었음을 알린다.


4. 창조적 재탄생 : 고추, 각자의 개성을 입다


고추는 단순히 기존의 음식을 맵게 만드는 첨가물에 그치지 않았다. 각 지역의 전통적인 식문화와 만나 전혀 새로운 미식의 세계를 창조했다.


중국에서 고추는 각 지역의 전통 향신료 및 조리법과 결합하며 다채로운 매운맛의 스펙트럼을 만들어냈다. 가장 먼저 고추를 받아들인 귀주는 발효 문화와 결합하여 시고 매운맛, ‘쏸라(酸辣산라)’를 탄생시켰다. 후난은 고추 본연의 맛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강렬하고 순수한 매운맛, ‘샹라(香辣향라)’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오늘날 중국 매운맛의 대명사가 된 사천은 전통 향신료인 화자오(花椒)의 얼얼한 맛과 고추의 매운맛을 결합하는 혁신을 통해, 혀를 마비시키는 듯한 중독성의 ‘마라(麻辣)’를 완성했다. 마파두부와 훠궈는 이러한 창조적 융합이 빚어낸 걸작이다.


한편, 한반도에서 고추는 ‘발효’라는 거대한 전통과 만나 운명적인 조우를 이룬다. 고추가 들어오기 전, 우리의 김치는 소금에 절인 채소에 마늘, 생강, 천초 등으로 맛을 낸 하얀 ‘백김치’ 형태였다. 하지만 고춧가루의 등장은 김치의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고춧가루는 김치에 매력적인 붉은색과 먹음직스러운 매운맛을 더했을 뿐만 아니라, 젓갈의 비린내를 잡고 유산균 발효를 촉진하며 김치의 저장성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역할을 했다. 고추와 김치의 만남은 한국 음식 문화사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고추는 장(醬) 문화에도 깊숙이 스며들었다. 기존의 된장, 간장에 고춧가루와 찹쌀 등을 섞어 발효시킨 ‘고추장’의 탄생은 한식의 맛을 한 단계 더 풍부하게 만들었다. 고추장은 찌개, 볶음, 무침 등 어떤 요리에도 활용 가능한 전천후 조미료로 자리 잡으며, ‘매콤달콤함’이라는 한국적인 맛의 원형을 만들어냈다. 중국의 매운맛이 주로 요리 과정에서 즉석으로 조합되는 ‘소스’의 개념에 가깝다면, 한국의 매운맛은 고추장과 김치라는 발효된 ‘기반(플랫폼)’ 위에 세워졌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5. 미각을 넘어, 기질의 상징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매운맛은 단순한 미각을 넘어, 특정 지역 사람들의 기질과 문화를 대변하는 상징이 되었다. 중국 혁명의 지도자 마오쩌둥(후난 출신)과 덩샤오핑(사천 출신)이 매운 음식을 즐겼다는 사실은, 매운맛을 먹는 행위를 강인하고 정열적인 혁명가의 기질과 연결시켰다. “고추를 먹지 않으면 혁명을 할 수 없다(不吃辣椒不革命)”는 말은 이러한 인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매운맛 좀 볼래?’라는 말을 통해 상대에게 고통을 주겠다는 위협을 표현하고, 힘든 시기를 ‘고추보다 매운 시집살이’에 비유하기도 한다. 얼큰한 음식을 먹으며 스트레스를 푸는 문화는 매운맛을 통해 고통을 이겨내고 정화하려는 한국인 특유의 ‘한(恨)’의 정서와도 맞닿아 있다. 역동적이고 ‘빨리빨리’를 외치는 한국인의 급한 성격이 매운 음식 선호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도 흥미롭다.


6. 결론 : 붉은 맛, 새로운 역사를 쓰다


아메리카 대륙의 야생 식물이었던 고추가 대항해 시대의 파도를 넘어 동아시아에 상륙한 것은, 인류의 미각사에 기록될 위대한 사건이었다. 처음에는 독초라 오해받고 관상용으로 취급받던 이 낯선 열매는, 시대의 아픔과 민중의 결핍을 자양분 삼아 대륙의 심장부와 반도의 끝까지 퍼져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중국의 ‘마라’와 한국의 ‘고추장’이라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미식의 걸작을 탄생시켰다. 붉은 맛의 대장정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이 강렬하고 매력적인 맛은, 음식이 어떻게 역사와 문화, 그리고 한 민족의 정신과 만나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는지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여담 : 튜브 고추장은 언제부터 등장했을까?


언제부터인가 국적기 기내식에서는 손가락만한 튜브 고추장을 주기 시작했으며, 마트에는 휴대하기 편리한 튜브형 고추장이 진열되어 있다. 여행갈 때 튜브고추장과 튜브쌈장은 필수품이 된지 오래다. 그렇다면 이 튜브형 고추장은 언제부터 세상에 나왔을까?


국립중앙과학관에서 주최하는 ‘전국학생과학발명품경진대회’라는 행사가 있다. 1979년부터 계속 되어온 행사인데, 학생들의 출품 발명품을 심사하는 대회이다.


나는 대학생때 이 대회에 출전하였다. 시중에 고추장은 커다란 통에 든 것만 있었기 때문에, 등산을 가거나 여행 갈 때 불편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튜브형 고추장을 출전 품목으로 만들어서 이 대회 주최측에 참가 신청을 하였다.


80년대 중반에 대한민국에는 튜브형 고추장이라는 물건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참고로 할 만한 모델이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와 상의한 끝에, 당시에도 있었던 여성용 화장품 튜브를 여러개 수집하여, 내용물을 비우고 깨끗하게 세척한 다음, 이 안에 고추장과 된장을 넣고 재밀봉 하였다. 튜브 표면에는 스티커 형식의 견출지에 매직으로 ‘튜브 고추장’이라고 써서 폼나게 붙였다.


이런 제품을 5가지 만들어서, ‘전국학생과학발명품경진대회’에 제출하고는, 당선자 발표날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경진대회에 출품된 발명품들은 일정 기간동안 전시되어 관람객들에게 공개되었고, 누구나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낙방이었다.

주최측에 찾아가서 낙방 사유를 물어보니, ‘튜브에 고추장을 넣었다는 흔한 아이디어 일 뿐, 이것을 발명이나 실용신안으로 선정할 수 없다’라는 대답이었다.


낙심했지만 인생은 본래 실망의 연속 아니던가. 그냥 잊어버리고 지내던 중, 6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서 슈퍼마켓에 고추장 튜브가 등장한 것을 목격하였다. 튜브의 크기와 튜브캡의 모양, 노즐의 크기까지도 내가 만든것과 거의 일치하였다.


그때가 80년대다.


내가 제일 먼저 아이디어를 냈건만, 큰 기업이 먼저 상품화를 했다는 것이 씁쓸했다. 그래서 그 회사 기획실에 전화를 해서 물어보니, 회사측에서는 자기네들의 아이디어라면서 ‘전국학생과학발명품경진대회’에 출품된 것을 보고 모방한 것이 아니라며 펄쩍 뛰었다.


나는 그 이후로는 발명경진대회 같은곳에 발명품을 내어 출전하지 않는다. 지금도 해외에 가기 위해 비행기를 탈 때마다, 기내식에 함께 나오는 고추장 튜브를 보면, 옛날 생각이 나서 쓴웃음을 짓곤 한다.


다윈이 1859년 '종의 기원'을 발표하기 전, 그와 유사한 진화론의 핵심 개념인 '자연선택'을 독자적으로 연구하여 다윈에게 먼저 편지를 보낸 학자가 있었다. 바로 영국의 자연사학자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이다.

월리스의 편지를 받은 다윈은 자신의 20년에 걸친 연구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음을 알고 충격을 받았고, 다윈의 친구들이 다윈을 지지하여 주는 바람에 진화론의 선구자는 다윈으로 굳어졌다.


뉴튼의 미적분도 그렇다. 뉴튼과 동일한 시기에 독일의 라이프니츠가 미적분을 발표하였고, 누가 먼저인가를 놓고 오랫동안 치열한 논쟁을 한 역사가 있다.


위의 역사적 논쟁처럼, 내가 고추장 튜브를 처음 발명하지 않았어도, 몇 년안에 누군가가 발명했을 것이 분명하다. 인류의 지적발전은 대개 비슷한 시기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임윤아가 옷속에 품고 500년전으로 날아간 튜브 고추장을 보고 있자니, 순수했던 어린시절에 받은 마음의 상처가 지금도 지워지지 않고 다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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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임윤아의 이 표정은 옛날 기억을 잊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소녀시대 임윤아가 이렇게 숟가락을 들고 웃어준다면, 세상의 거의 모든 남자들은 불닭볶음면보다 10배 매운 것도 달게 먹지 않을까. 부처님 조차도 눈 딱감고 드실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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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냉장고를 뒤져서 고추장 버터 비빔밥을 만들어 먹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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