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영화는 단순한 오락을 넘어 인간 존재와 세계의 본질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는 철학적 텍스트로 기능한다. 특히 크리스토퍼 놀란의 '테넷', 워쇼스키 자매의 '매트릭스', 그리고 카메론 크로우의 '바닐라 스카이'는 시간, 현실, 자아라는 개념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탐구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동양의 불교적 사유와 서양의 기독교적 세계관을 떠올리게 한다.
이 세 영화는 전생, 환생, 혹은 그와 유사한 순환적 구조와 가상현실이라는 소재를 공유하는 듯 보이지만, 그 기저에 깔린 철학적 지반은 현저히 다르다. 이 글은 각 영화의 세계관을 분석하여, '테넷'이 불교적 세계관과 어떻게 다른지, '매트릭스'가 왜 기독교적 서사에 가까운지, 그리고 '바닐라 스카이'가 불교의 공(空)사상과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테넷의 세계관 : 결정론적 물리법칙과 불교적 연기법의 간극
크리스토퍼 놀란의 '테넷'은 시간을 역행하는 '인버전'이라는 개념을 통해 전례 없는 시각적 경험과 지적 도전을 선사한다. 모든 사건이 순행하는 시간과 역행하는 시간 속에서 동시에 존재하며 하나의 거대한 순환 고리를 형성하는 세계. 이러한 설정은 언뜻 불교의 윤회(輪廻)나 인과응보(因果應報) 사상을 연상시킬 수 있다. 원인이 결과를 낳고, 그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어 끝없이 이어지는 연기(緣起)의 법칙처럼, '테넷'의 세계는 과거와 미래가 서로의 꼬리를 무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다. 주인공이 미래의 자신에 의해 구원받고, 현재의 자신이 미래의 자신을 돕기 위한 행동을 하는 구조는 인과의 사슬이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테넷'의 세계관을 불교적이라고 단정하기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가장 큰 차이점은 '자유의지'와 '해탈(解脫)'의 가능성이다. '테넷'의 핵심 대사인 "일어난 일은 일어난 것이다(What's happened, happened)"는 이 영화의 세계가 철저한 물리적 결정론에 기반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모든 사건은 이미 정해져 있으며, 등장인물들의 행동은 그 정해진 결과를 실현하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그들의 자유의지는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제한된 의미의 자유의지다. 주인공은 세상을 구원하지만, 그 구원조차 이미 예정된 역사의 일부였다. 이 세계는 시작도 끝도 없는 완벽한 폐쇄회로(closed loop)이며, 그 누구도 이 인과의 사슬을 끊거나 벗어날 수 없다.
반면 불교의 연기법과 윤회 사상은 결정론과는 궤를 달리한다. 불교에서 인과는 업(業, Karma)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된다. 현재의 삶은 과거의 업의 결과이지만, 동시에 현재의 의지적 행위(업)를 통해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다. 즉, 인과의 법칙을 인정하되 그 안에서 인간의 주체적인 선택과 변화의 가능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러한 인과와 윤회의 사슬 자체를 끊고 열반(涅槃, Nirvana)에 이르는 것, 즉 '해탈'이다. 고통의 원인인 무명(無明)과 갈애(渴愛)를 소멸시킴으로써 다시는 윤회의 수레바퀴에 오르지 않는 완전한 자유를 얻는 것이 불교적 구원의 핵심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테넷'의 세계는 불교적이라기보다는 비불교적, 혹은 반(反)불교적 세계관에 가깝다. 그곳에는 해탈의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다. 등장인물들은 윤회의 고리를 끊으려는 수행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 고리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톱니바퀴의 역할을 할 뿐이다. 그들의 싸움은 순환을 벗어나기 위함이 아니라, 정해진 순환이 파괴되지 않도록 지키기 위한 투쟁이다.
'테넷'은 불교의 ‘무상(無常)’과 궤를 달리 하고 있다. 따라서 '테넷'은 불교적 세계관의 외피를 빌려왔을 뿐, 그 본질은 냉정한 물리법칙이 지배하는 결정론적 세계이며, 영적 구원이나 초월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길을 걷고 있다.
2) 매트릭스의 세계관 : 불교적 각성인가, 기독교적 구원인가
'매트릭스'는 가상현실에 갇혀 살아가는 인류와 그들을 구원하려는 저항군의 이야기를 통해 현실과 환상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주인공 네오가 빨간 약을 선택하고 자신이 살아온 세계가 거짓임을 깨닫는 과정은 불교에서 말하는 '각성(覺醒)', 즉 무명에서 벗어나 실상을 직시하는 과정과 매우 유사하게 보인다. 매트릭스라는 인공 자궁은 끝없는 욕망과 고통이 반복되는 윤회의 세계(사바세계)에 대한 은유로 해석될 수 있으며, 여기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곧 해탈을 향한 구도의 길처럼 비친다.
하지만 영화의 서사 구조와 상징 체계를 깊이 들여다보면, '매트릭스'는 불교적 세계관보다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훨씬 더 깊게 뿌리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명백한 증거는 '구원자(The One)'로서의 네오의 존재다. 네오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예언된 유일한 존재이며, 그의 이름 'Neo'는 'One'의 아나그램이다. 그의 본명인 앤더슨(Anderson)은 '사람의 아들(Son of Man)'을 의미하며, 이는 예수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그는 인류의 죄(기계와의 전쟁)를 대신 짊어지고 자신을 희생하며, 죽음(스미스와의 동화)을 맞이했다가 부활(매트릭스의 재부팅)하여 인류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이러한 서사는 명백히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희생, 부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한다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따르고 있다.
여담이지만, 북유럽, 특히 노르웨이쪽 언어에서 단어끝에 son이 붙는 것은 'XX의 아들'이라는 의미이다. Anderson은 Anders의 아들 이라는 의미인데, Anders는 고대 그리스어 'Andreas(Ἀνδρέας)'에서 유래했으며, '남자'를 뜻하는 'anēr(ἀνήρ)'의 소유격 형태인 'andros(ἀνδρός)'에서 파생되었다. 따라서 'Anders'는 '남자다운', '용감한' 등의 의미를 가지며, 결국 '남자 사람' 이라는 의미이다. 즉 Anderson은 '사람의 아들' 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면 스칼렛 요한슨의 아버지 이름은 무엇인가? 요한슨이 성 이라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요한슨은 '요한의 아들'이라는 의미여서, 스칼렛 요한슨의 아버지 이름은 '요한' 이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된 '바이킹스-발할라'에서 주인공인 '레이프 에릭손'의 아버지 이름은 '에릭 레드' 이었다. 에릭의 아들이어서 에릭손이 된다.
영화 속 다른 인물과 지명 역시 기독교적 상징으로 가득하다. 네오를 이끄는 모피어스는 예언의 신탁을 믿고 구원자를 기다리는 세례 요한과 같은 역할을 하며, 네오를 사랑의 힘으로 부활시키는 여성 전사 트리니티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Trinity)'를 상징한다. 인류 최후의 보루인 '시온(Zion)'은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에게 약속의 땅이자 천상의 예루살렘을 의미하는 지명이다. 반면, 네오의 숙적인 스미스 요원은 인류를 타락시키고 시스템을 파괴하려는 사탄적 존재로 그려진다. 이처럼 '매트릭스'의 세계는 선과 악의 이분법적 대결 구도, 예언된 구원자의 강림과 희생, 그리고 인류의 구원이라는 기독교적 서사 원형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다.
불교의 깨달음은 외부의 구원자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수행을 통해 스스로 얻어내는 것이다. 부처는 길을 가리키는 스승일 뿐, 누구도 대신해서 깨달음을 줄 수는 없다. 또한 불교적 해탈의 목표는 자아(自我)의 소멸을 통해 '나'라는 관념에서 벗어나는 무아(無我)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지만, '매트릭스'에서 네오는 오히려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초인적인 자아를 실현하고 세상을 구원하는 영웅이 된다. 이는 자아의 해체보다는 자아의 완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적 인간관에 더 가깝다. 따라서 '매트릭스'는 불교적인 각성의 모티브를 차용하고 있지만, 그 핵심 서사와 상징 체계는 명백히 기독교적 구원론에 기반을 둔, 매우 기독교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3) 바닐라 스카이와 불교의 공(空)사상
'바닐라 스카이'는 부유한 플레이보이 데이빗 에임스의 삶이 의문의 교통사고 이후 꿈과 현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며 송두리째 흔들리는 과정을 그린 미스터리 스릴러다. 영화의 결말에서 관객은 데이빗이 겪는 대부분의 혼란이 사실은 그가 선택한 '자각몽(Lucid Dream)'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는 사고로 흉측해진 얼굴과 잃어버린 사랑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기억과 욕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세계에 스스로를 유폐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바닐라 스카이'의 세계관은 불교의 핵심 사상 중 하나인 공(空, Śūnyatā)사상과 놀라울 정도로 깊은 연관성을 맺고 있다. 공사상은 모든 존재와 현상이 고정불변의 독립적인 실체를 갖고 있지 않으며, 수많은 원인과 조건(인연)이 상호 의존하여 잠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일 뿐이라고 설파한다. 즉, 우리가 '나'라고 믿는 자아, '현실'이라고 믿는 세계는 모두 실체가 없는 텅 빈(空) 것이며, 마치 꿈이나 환상, 물거품과 같다는 것이다. 반야심경의 유명한 구절인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 현상(色)이 곧 공이며, 공이 곧 물질적 현상임을 의미한다.
데이빗의 자각몽 속 세계는 이러한 공사상을 완벽하게 시각화한다. 그가 경험하는 모든 것 – 아름다운 연인 소피아와의 사랑, 되찾은 잘생긴 얼굴, 평화로운 일상 – 은 실체가 없다. 그것은 오직 데이빗의 기억, 무의식, 욕망이라는 조건들이 결합하여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데이빗이 겪은 자각몽속의 사건들은 데이빗이 ‘불러내서’ 등장한 가상 현실들이었다.
그의 세계는 그의 마음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존재하며, 그의 마음이 흔들릴 때(무의식 속 죄책감이 고개를 들 때) 세계 역시 균열을 일으키고 악몽으로 변모한다. 이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라는 불교 사상을 그대로 반영한다.
데이빗이 느끼는 행복과 고통 또한 실체가 없다. 자각몽 속에서의 행복은 과거의 기억을 재조합한 것에 불과하며, 그의 고통은 억압된 죄책감이 만들어낸 환영이다. 그는 이 허상에 집착(執着)함으로써 더 큰 혼란과 고통을 겪게 된다. 불교는 바로 이러한 집착이 고통의 근원이라고 본다. 실체 없는 것을 실재한다고 믿고,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기를 바라는 어리석음(무명) 때문에 고통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닐라 스카이'는 한 남자가 자신이 창조한 꿈의 세계 속에서 행복과 고통의 극단을 오가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과 자아 역시 그와 다르지 않은, 인연 따라 만들어진 일시적인 구성물, 즉 '공'한 것임을 강력하게 암시하는 영화라 할 수 있다.
4) 영화의 흐름으로 본 공사상 : 무명에서 깨달음으로
'바닐라 스카이'의 서사 구조는 주인공 데이빗이 불교에서 말하는 고통의 발생 과정과 그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의 과정을 점진적으로 밟아나가는 모습으로 해석할 수 있다.
1단계 : 무명(無明)과 집착(執着)의 삶
영화 초반의 데이빗은 부, 외모, 쾌락이라는 세속적 가치에 집착하며 살아간다. 그는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다고 믿으며, 자신의 삶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이는 세상과 자아의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 즉 '무명'의 상태다. 그는 진정한 관계보다는 피상적인 만남을 즐기며, 자신의 존재를 외부의 조건들에 의존한다.
2단계 : 고통(苦)의 발생과 회피
줄리(카메론 디아즈)와의 사고는 데이빗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한다. 그는 잘생긴 얼굴을 잃고, 사랑하는 소피아(페넬로페 크루즈)와의 관계도 위협받는다. 이는 그가 집착하던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무상(無常)'의 진리를 고통스럽게 체험하는 과정이다. 이 고통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던 데이빗은 '자각몽'이라는 도피처를 선택한다. 이는 고통의 원인을 직시하고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달콤한 환상을 통해 고통을 회피하려는 시도다.
3단계 : 허상 세계의 균열과 실상의 자각
자각몽 속에서 완벽한 행복을 누리던 데이빗의 세계는 점차 균열을 보이기 시작한다. 소피아의 얼굴이 줄리의 얼굴로 변하고,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기이한 일들이 반복된다. 이는 그의 무의식 속에 억압된 죄책감과 트라우마가 환상의 세계를 침범하는 것으로,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진 허상이라도 결국은 불완전하며 실체가 없음을 보여준다. 이 혼란의 과정은 데이빗으로 하여금 자신이 경험하는 세계의 본질에 대해 의심하게 만드는, 깨달음을 향한 첫걸음이 된다. 그는 이 세계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문제를 깨달은 데이빗은 회사 건물 로비로 뛰쳐나가서 ‘지술지원팀’을 목청껏 부른다.
4단계 : 깨달음과 선택
영화의 클라이맥스, '라이프 익스텐션'의 기술 지원 담당자를 만나는 장면은 데이빗이 마침내 모든 진실을 마주하는 '깨달음'의 순간이다. 그는 자신이 지난 150년간 스스로 만든 꿈속에 갇혀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가 사랑했던 소피아, 그를 괴롭혔던 모든 혼란이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 즉 '공'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이 순간 그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달콤하지만 거짓된 꿈속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고통스럽지만 진실된 현실로 돌아갈 것인가.
5단계 : 해탈(解脫)을 향한 투신, 백척간두에서 진일보
데이빗의 마지막 선택은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각몽을 끝내고 불확실한 미래의 현실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이 투신은 단순한 자살이 아니라, 거짓된 자아와 허상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려는 주체적인 결단이다. 그는 "진짜 삶"을 원한다고 외치며, 더 이상 환상에 집착하지 않고 현실의 고통을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이는 곧 허상을 허상으로 직시하고, 그것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음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해탈'의 과정에 대한 완벽한 은유다. 그는 꿈이라는 윤회의 굴레를 스스로 끊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향해 몸을 던진 것이다.
기술지원팀은 데이빗에게 당신이 가장 두려워 하는것은 고소공포증 이므로, 높은데서 뛰어내려서 깨어나야 한다고 조언한다. 데이빗은 고소공포를 극복하고 옥상에서 뛰어내렸고, 눈을 뜨는 장면에서 영화는 끝난다.
이 행위는 바로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였다. 실제로 데이빗은 빌딩 옥상에서 발을 떼고 투신한다.
이처럼 '바닐라 스카이'는 한 남자의 개인적인 비극과 사랑 이야기를 넘어, 인간이 어떻게 현실을 구성하고, 그 구성된 현실에 집착하여 고통받으며, 궁극적으로는 그 허상을 깨닫고 벗어나는지를 불교적 세계관의 틀 안에서 심도 있게 그려낸 수작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관객에게 "눈을 뜨라(Open your eyes)"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던지며, 우리 역시 데이빗과 같이 스스로 만든 꿈속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만든다.
불교적 서사구조로 위장한 수많은 영화들이 있었다. 여기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인터스텔라와 인셉션도 그 부류에 해당한다. 하지만 바닐라스카이 만큼 공(空)사상에 직접 연관된 불교적 영화는 지금도 흔치 않다.
이 영화는 본래 스페인의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의 영화 《오픈 유어 아이즈》를 리메이크 한 영화였다.
흥미롭게도 원작에 출연했던 배우 페넬로페 크루즈는 "바닐라 스카이"에서도 같은 역할로 출연했다. 같은 역할을 두 번이나 했던 페넬로페 크루즈는 실제로 어떤 감정을 겪었을까? 어쩌면 대각(大覺)을 얻어 해탈하지 않았을까?
이 영화를 찍다가 톰 크루즈가 니콜 키드먼과 이혼하고 페넬로페 크루스와 사귀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 현실은 페넬로페 크루즈가 ‘불러내서 만들어낸’ 허상은 아니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