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들어 행화촌을 가리키네

by 한병철 Mikhail Khan

한국에서 정규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라면 박목월의 시 ‘나그네’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무려 교과서에 실려 있는 시 이기 때문이다.


나그네 - 박목월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南道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의 나그네는 매우 회화적인 시 이다. 시를 감상하면 눈 앞에 이미지가 떠오른다.

구름과 밀밭이 어우러진 풍경, 석양 무렵에 마을 입구에 도착하는 나그네, 그 마을에서는 술익는 냄새가 풍겨나오고, 나그네는 하루 여정을 정리하는, 그런 이미지다.


그런데, 중국 당나라때 시인인 두목(杜牧)을 아는 사람이라면, 박목월의 나그네를 들으면 반드시 ‘청명(淸明)’을 떠올린다.



청명(淸明) - 두목(杜牧)


淸明時節雨紛紛 路上行人欲斷魂

청명시절우분분 노상행인욕단혼

借問酒家何處有 牧童遙指杏花村

차문주가하처유 목동요지행화촌


청명 날에 비 부슬부슬 내리니

길 가는 나그네 마음 심란하게 하네

술 파는 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목동이 손가락으로 행화촌을 가리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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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풍류객들의 마음속에 술의 낙원으로 각인된 그 곳, 행화촌은 실제 있는 지명이며, 현재 중국 산서성(山西省) 분양시(汾阳市)에 있다. 이곳에서 만드는 술은 ‘분주(汾州)’인데, 분주 공장의 위치도 산서성 분양시 행화촌진(山西省汾阳市杏花村镇)이다.


이 지역에 ‘분하(汾河)’라는 강이 흐르기 때문에, 고대의 지역 이름이 ‘분주(汾州)’가 되었다.



산서성 분주 - 중국 백주의 발상지와 그 유산


중국의 술 문화는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그 중심에는 언제나 산서성(山西省) 분주(汾州)가 있었다. 분주는 중국 전통 백주의 발상지로, 그 독특한 양조 기술은 시간을 넘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오늘날 중국 각지에서 생산되는 백주의 뿌리를 찾는다면, 결국 산서성 분주로 이어지게 된다. 이곳에서 탄생한 술 장인들은 중국 전역으로 흩어져 지역 특색에 맞는 백주를 만들며, 하나의 문화적 흐름을 형성했다.

분주의 역사와 그 영향력은 단순히 술의 맛을 넘어, 중국 사회의 경제적·문화적 발전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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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분주의 역사 - 백주의 탄생지


산서성 분주 지역의 양조 역사는 상나라(商代, 기원전 1600~1046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미 곡물을 발효시켜 술을 만드는 기술이 발달했으며, 특히 저량(秬鬯, jù chàng)이라는 제사용 술이 유명했다.


한나라(漢代)와 당나라(唐代)를 거치며 분주는 더욱 유명해졌다. 당대 시인 두보(杜甫)는 시에서 분주의 술을 찬양하기도 했으며, 이 시기 분주 지역에서는 대곡(大麴) 발효 기술이 발전하며 오늘날 백주의 원형이 만들어졌다.


이 당시에 만들어진 분주는 현재와 같은 알콜돗수가 높은 증류주가 아니었고, 양조해서 마시는 15도 미만의 술 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중국에서 증류주가 만들어 지기 시작한 역사는 원나라때부터 이기 때문이다. 하루 백잔의 술을 마시고 시를 썼다는 이태백이 마셨던 술도, 지금처럼 50도짜리 고량주가 아니었고, 겨우 4도 정도의 양조술 이었다. 이태백 시절에 돗수 높은 증류주는 없었기 때문이다.


'알코올(alcohol)'이라는 단어 자체는 아랍어 'al Kuhul'에서 유래했다.

이는 중세 이슬람 연금술사들이 향수를 만들기 위해 증류 기술을 발전시키면서 '에탄올'과 같은 정제된 형태의 알코올을 얻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사용된 용어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대(唐代)에는 소주(燒酒)를 제조해 마신 기록이 있지만, 현재의 증류주와는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현대적인 의미의 증류 기술, 즉 바이주(白酒)의 완성형은 원대(元代)에 들여온 증류 기술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나라는 몽골 제국으로, 광대한 영토를 아우르며 서방 세계와의 교류가 활발했기에 이 시기에 새로운 기술이 중국땅으로 전래되었다.


아랍어 '아라크(عرق, 'araq)'는 아랍어로 '땀(sweat)'을 의미한다.

이는 증류 과정에서 술이 증발하여 차가운 부분에 응결되어 방울방울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땀방울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아랍어 '아라크'는 증류 기술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어 사용되었다.

중동, 지중해, 발칸 지역, 인도 아대륙 등 여러 지역에서 아락(Arak)이라는 이름의 증류주가 존재하며, 터키의 증류주인 라키(Rakı)도 '아라크'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다. 현재 티베트 라싸에서 마시는 증류주의 이름도 '아락' 이다.


몽골 제국이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면서 서방의 증류 기술과 함께 '아라크'라는 명칭이 동양으로 전파되었다.

중국에서는 이를 한자로 음차하여 '아랄길(阿剌吉)' 또는 '아리걸(阿里乞)' 등으로 불렀고, 고려 후기에 몽골군을 통해 한반도에 증류 기술이 전해지면서, 소주(燒酒)를 '아락주' 또는 '아랑주'라고 부르기도 했다. 특히 개성 지방에서 '아락주'라는 명칭이 쓰였다.


명나라(明代)와 청나라(清代)에 이르러 분주는 중국 최고의 백주 산지로 명성을 떨쳤다. 특히 분주(汾州)의 ‘분주노주(汾州老酒)’는 황실에 진상되는 귀한 술이었다. 청나라 강희제(康熙帝)는 분주의 술을 특히 좋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시기 분주의 양조 기술은 체계화되었고, 지역의 기후와 물이 술 맛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산서성의 청류(清流)와 건조한 기후는 발효 과정에서 세균 번식을 억제해 깔끔한 맛을 내는 데 기여했다.



P1060641.JPG 중국 사천성 루저우 '노주노교' 술공장의 간판. 1573년부터 증류 양조를 시작했음을 알리고 있다.



2. 분주 장인들의 대이동 - 중국 백주의 다양성 탄생


명청 시대, 격변기의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많은 분주 양조 장인들은 생계를 위해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각지에서 자신들의 기술을 전파하며 현지의 재료와 환경에 맞는 새로운 백주를 탄생시켰다.



사천성으로 : 오량액(五粮液)의 탄생


분주의 장인들이 사천성(四川省) 이빈(宜宾)에 정착하면서, 현지의 고량(高粱), 쌀, 옥수수, 밀, 보리 등 다섯 가지 곡물을 활용한 오량액(五粮液)이 만들어졌다. 이 술은 분주의 대곡 발효 기술과 사천의 습윤한 기후가 결합해 독특한 풍미를 자랑하게 되었다.


노주노교의 고향으로 유명한 ‘노주(瀘州)’에서 술을 만들기 시작한 것도 알고보면 명나라때인 1573년이다. 그래서 '국교1573(国窖1573)'이라는 유명한 술이 탄생했다.

1573년 명나라는 만력제(萬曆帝) 신종(神宗)이 즉위하여 황제에 오른 해 이고, 조선 선조에게는 6년째 되는 해 였다. 사천성 백주의 역사도 알고보면 조선 선조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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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이저우성과 마오타이(茅台)


마오타이(茅台)는 오늘날 중국을 대표하는 명품 백주다. 그 기원을 따져보면, 분주의 양조 기술이 구이저우성(贵州省)으로 전파된 결과다. 청나라 때 분주 장인들이 구이저우에 정착하며, 현지의 붉은 고량과 특수한 발효 공정을 접목시켰다. 마오타이의 독특한 향은 복합발효(복합곡) 기술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오타이주는 8번의 재발효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공정이 매우 길고 복잡하며 특이한 맛을 낸다.


강소성과 양하대곡(洋河大曲)


강소성(江苏省)의 양하대곡(洋河大曲) 역시 분주의 영향을 받았다. 이 지역은 물이 풍부하고 기후가 온화해, 분주의 기술과 결합해 부드럽고 달콤한 백주가 탄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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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백주를 대표하는 술, 분주(汾酒)


오늘날 산서성을 대표하는 술은 분주(汾酒)다. 이 술은 분주의 전통을 이어받아 깔끔하고 은은한 향이 특징이다. 분주는 향형이 청향형이며, 북경 근처의 이과두주와 함께 청향형 백주의 대표이다.


산서성 분주는 중국 백주의 발상지로서, 그 기술과 문화를 전국으로 퍼뜨린 산실이었다. 분주의 장인들은 경제적·사회적 여건에 따라 각지로 흩어졌지만, 오히려 이로 인해 중국 백주의 다양성이 꽃피울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백주 한 잔에는 분주의 역사와 장인들의 지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국 유명 백주들은 거의 대부분 산서성 분주의 영향하에서 발생했다. 분주 장인들이 각 지역에 퍼져 나가서 현지 스타일로 새롭게 만들어 낸 것이, 현재의 유명 백주들의 기원이 된 것이다.





이제 바야흐로 본격적인 장마철의 시작이다.

시인 두목의 심정이 1200년을 넘어 현대의 술꾼에게도 이어진다.


長霖時節雨紛紛 路上行人欲斷魂

借問酒家何處有 牧童遙指杏花村

장마철에 비 부슬부슬 내리니

길 가는 나그네 마음 심란하게 하네

술 파는 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목동이 손가락으로 행화촌을 가리키네


행화촌을 찾아가고 싶은, 비 내리는 장마철의 어느날 이다.

그 술이 30년산 분주라면 더 이상의 행복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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