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6년 ‘맥주 순수령’과 2024년 ‘치킨 중량표시제’
식탁 위의 통치술
인류의 역사는 통제와 자유의 끊임없는 변주곡이다. 그중에서도 ‘먹거리’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가장 오래되었으면서도 가장 민감한 통치 행위 중 하나다. 16세기 바이에른의 차가운 맥주 잔 속에서부터 21세기 대한민국 배달 상자 속 치킨에 이르기까지, 국가는 끊임없이 시민의 식탁 위에 법적 잣대를 들이밀어 왔다.
1516년 공포된 바이에른의 '맥주 순수령(Reinheitsgebot)'과 최근 논의되고 시행된 대한민국의 '치킨 중량표시제'는 얼핏 보기에 시공간적 간극이 크다. 그러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소비자 보호, 공정 거래의 확립, 그리고 품질의 표준화라는 국가적 열망이 투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놀라운 평행이론을 보여준다.
1. 맥주 순수령 : 유럽 식품 위생법의 시초이자 문화적 정체성
1516년 4월 23일, 바이에른 공국의 공작 빌헬름 4세는 잉골슈타트에서 역사적인 법령을 선포한다. "맥주를 양조할 때는 오직 보리, 홉, 물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훗날 효모의 존재가 밝혀지며 효모가 추가되었다.)
당시 맥주 순수령이 등장한 이유는 단순히 '맛있는 맥주'를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다. 맥주순수령의 발생 배경은 기근과 독성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식량 안보의 문제
당시 양조업자들은 밀과 호밀을 사용하여 맥주를 만들었는데, 이는 주식인 빵의 재료를 고갈시켜 빵 가격 폭등을 초래했다. 빌헬름 4세는 밀과 호밀은 빵을 만드는 데만 사용하도록 제한함으로써 국민의 굶주림을 방지하려 했다.
보건 위생의 문제
중세 시대에는 맥주의 보존성을 높이거나 향을 내기 위해 독초, 수선화, 심지어 그을음이나 석회를 섞는 파렴치한 행위가 빈번했다.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오만가지 식재료를 다 집어넣었던 것이다. 특히 허브나 독초가 들어가면 맥주맛이 매우 강하게 느껴졌으므로, 인간의 건강을 생각지 않고 각자의 레시피대로 아무거나 넣는 경우가 흔했다.
독일지역은 예나 지금이나 허브를 이용한 약 제조 전통이 있다. 일명 ‘비터(bitter)’라고 불리는 허브, 뿌리, 과일 껍질 등을 침출하여 만든 '크로이터리퀘르(Kräuterlikör, 허브 리큐르)'가 그것이다. 독일 수퍼마켓에 가면 허브를 넣은 술을 감기약으로 판매하고 있으며, 한국에는 예거마이스터가 많이 알려져 있지만, 독일 현지에는 운더베르크 (Underberg), 쿠멀링 (Kuemmerling), 베네딕티너 (Benedictine), 불베리 (Wurzelpeter), 베렌첸 (Berentzen) 등등으로 대표되는 허브증류주가 수백가지나 있다. 즉 독일지역은 허브를 넣은 술이 오래된 전통이라는 것이다. 순수령은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저질 맥주로부터 국민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방역적 성격이 강했다.
맥주순수령은 바이에른을 넘어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오늘날 독일 맥주가 세계적인 신뢰를 얻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는 단순한 규제를 넘어 '독일 맥주'라는 브랜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근간이 되었다.
2. '치킨 공화국'의 신뢰 회복을 위한 고육지책, 치킨 중량표시제
대한민국에서 치킨은 단순한 음식을 넘어 '소울 푸드'이자 거대한 산업이다. 그러나 프랜차이즈 간의 과도한 경쟁과 원재료 가격 상승 속에서 소비자들은 이른바 '꼼수'에 노출되어 왔다. 이에 정부는 소비자 알 권리 충족과 공정 거래 유도를 위해 치킨 중량표시제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슈링크플레이션'에 대한 응전
소비자의 불신 : 같은 '호'수의 닭을 사용한다고 하지만 브랜드마다, 혹은 가맹점마다 실제 제공되는 양이 천차만별이라는 불만이 고조되었다. 조리 과정에서의 수분 손실을 감안하더라도, 소비자가 체감하는 양의 불균형은 시장 전체의 불신으로 이어졌다.
가격 투명성 확보:치킨 가격이 3만 원 시대를 향해 가면서, 가격 대비 가치(가성비)를 중시하는 소비자들은 정확한 '단가'를 알길 원했다. g(그램)당 가격을 비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시장의 투명성을 높이려는 목적이다.
치킨 중량표시제는 조리 전 생닭의 중량뿐만 아니라, 조리 후 최종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제품의 중량을 명시하도록 권고 또는 의무화하는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 이는 가공식품에만 적용되던 엄격한 기준을 조리 식품(외식)의 영역으로 확장하는 상징적 조치다.
3. 유사한 국가 개입의 논리
시공간을 초월한 이 두 제도는 다음과 같은 공통된 속성을 공유한다.
첫째, '정보의 비대칭성' 해소
공급자는 제품의 질과 양에 대해 완벽한 정보를 가지고 있으나, 소비자는 이를 확인하기 어렵다. 맥주 순수령은 맥주 안에 무엇이 들어갔는지 알 수 없던 소비자에게 '성분'을 보증했고, 치킨 중량표시제는 튀김옷 속에 가려진 '실제 양'을 보증한다.
둘째, 시장의 질서 유지와 표준화
질 낮은 맥주가 시장을 교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순수'라는 기준을 세웠듯, 중량을 속여 부당 이득을 취하는 업체를 걸러내기 위해 '중량'이라는 잣대를 세운 것이다. 이는 정직한 생산자를 보호하고 시장 전체의 상향 평준화를 꾀하는 전략이다.
4. 규제와 자율 사이의 딜레마
맥주 순수령과 치킨 중량표시제가 우리에게 던지는 함의는 단순히 '정직하게 팔자'는 도덕적 구호를 넘어선다.
표준화의 그늘 : 다양성의 억압
맥주 순수령은 독일 맥주의 품질을 높였지만, 반대로 벨기에나 영국처럼 다양한 부재료(과일, 향신료 등)를 사용하는 창의적인 양조 기법의 발전을 저해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치킨 중량표시제 역시 조리법의 다양성이나 '손맛'이라는 외식업의 특수성을 규격화된 수치 속에 가둘 위험이 있다.
신뢰 비용의 지불
국가가 나서서 규제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시장 내 자정 작용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의미한다. 중량을 재고 기록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행정적 비용과 비용 상승분은 결국 소비자의 몫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정확한 정보'를 얻는 대신 '가격 상승'이라는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셈이다.
먹거리 정의(Food Justice)의 실현
결국 이 두 제도는 국민의 삶과 가장 밀접한 음식을 통해 '국가는 국민을 기만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는 통치자의 인기를 얻기 위한 포퓰리즘이 될 수도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가장 기초적인 권리인 '먹을 권리'에 대한 공정성을 확보하려는 국가의 기본 책무에 해당한다.
1516년의 빌헬름 4세가 원했던 것은 바이에른의 평화와 안녕이었고, 오늘날 치킨 중량표시제가 지향하는 바는 건전한 소비 문화의 정착이다.
맥주 순수령이 오늘날 독일 맥주를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올렸듯, 치킨 중량표시제 또한 한국 치킨 산업이 단순히 'K-푸드'라는 유행을 넘어 글로벌 표준을 선도하는 신뢰 기반 산업으로 거듭나는 초석이 되어야 한다. 다만, 규제가 창의성을 죽이지 않도록, 그리고 수치가 본질(맛과 정성)을 압도하지 않도록 정책적 유연성을 발휘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우리는 이제 식탁 위의 수치를 넘어, 그 수치가 담보하는 '사회적 신뢰'의 무게를 측정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