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날아오른 두 개의 그림자
인류의 문화사에서 '박쥐'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가지 얼굴을 가져왔다. 서구 기독교 문명권에서 박쥐는 어둠과 악마, 흡혈의 공포를 상징하는 기괴한 생명체였으나, 동양의 유교 및 도교 문명권에서는 오복(五福)을 전하는 길조이자 신성한 영물로 대접받았다. 이 극적인 문화적 간극에도 불구하고, 동양과 서양은 각기 다른 시대에 박쥐를 아이콘으로 삼은 강력한 '정의의 집행자'를 탄생시켰다.
동양에는 당나라 시대부터 민초들의 고통을 보듬고 악귀를 소탕해온 구마대제(驅魔大帝) 종규(鍾馗)가 있고, 서양에는 현대 도시의 타락과 범죄에 맞서 검은 망토를 휘날리는 배트맨(Batman)이 있다. 이 두 존재는 단순히 박쥐라는 시각적 상징을 공유하는 것을 넘어, 비극적 서사와 공포를 이용한 악의 제압, 그리고 법의 한계를 넘어서는 자경단적 정의라는 철학적 궤적을 함께한다. 오늘은 배트맨보다 앞선 원조 박쥐 아이콘으로서의 종규를 조명하고, 무당검법의 초식과 현대 군사 문화에 이르기까지 박쥐가 상징해온 '정의의 기세'를 심층적으로 살펴보자.
1. 배트맨보다 먼저 등장한 박쥐 아이콘 : 구마대제 종규의 역사성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브루스 웨인의 배트맨은 1939년 '디텍티브 코믹스'를 통해 세상에 나왔다. 그러나 동양의 종규는 그보다 천 년도 더 전인 당나라 현종 시대의 전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종규는 문무를 겸비한 수재였으나, 그 탄생부터 비극적이었다. 과거 시험에서 당당히 장원 급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외모가 너무나 추악하고 험악하다는 이유로 황제는 그를 관직에서 축출했다. 부조리한 차별에 분노한 종규는 궁궐 층계에 머리를 부딪쳐 자결함으로써 자신의 결백과 강직함을 증명했다. 거 참, 성깔 하나는 대단하다.
사후, 그의 충직함을 가상히 여긴 염라대왕은 그를 '귀신의 왕'이자 '구마대제'로 임명하여 세상을 어지럽히는 악귀들을 다스리게 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종규가 대중에게 각인된 방식이다. 그는 항상 검은 도포를 입고, 부리부리한 눈과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공포스러운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는 배트맨이 범죄자들에게 공포를 심어주기 위해 박쥐 수트를 입는 심리적 기제와 정확히 일치한다. 종규는 스스로 '괴물'의 형상을 함으로써 괴물을 제압하는 다크 히어로의 원형을 천 년 전 이미 완성했던 것이다.
2. 종규는 왜 박쥐와 연관되는가? - 공포와 축복의 변주
종규와 박쥐의 결합은 동양적 사유의 정수를 보여준다. 서구의 배트맨에게 박쥐가 '트라우마'와 '공포'의 상징이라면, 종규에게 박쥐는 '인도자'이자 '결과물'이다. 중국어에서 박쥐를 뜻하는 '편복(蝙蝠)'의 '복(蝠)'은 행운의 '복(福)'과 성조까지 일치하는 동음이의어다. 이 언어적 유희는 종규의 사역에 심오한 의미를 부여한다. 중국문화에서 ‘박쥐(蝙蝠)’를 부르는 것은 '복(蝠)'을 원하는 것과 동일시 된다.
전통적인 종규도(鍾馗圖)에서 박쥐는 종규의 머리 위를 날거나 검 끝을 안내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는 '구사영복(驅邪迎福)'의 논리다. 종규가 강력한 법력과 검술로 사악한 기운을 베어내면(驅邪), 그 정화된 자리에 박쥐가 날아들어 오복을 채운다(迎福)는 뜻이다. 즉, 종규에게 박쥐는 단순히 기르는 동물이 아니라, 그가 행하는 정의의 목적지인 '평화'를 시각화한 존재다. 악귀가 들끓는 곳에 종규가 나타나면 박쥐가 그 길을 안내하고, 악귀가 사라진 곳엔 박쥐가 머문다. 이는 배트맨이 범죄를 소탕한 자리에 '배트 시그널'이 남는 것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3. 고담의 기사와 도교의 신들이 공유하는 유사점
두 인물의 유사성은 표면적인 상징을 넘어 캐릭터의 본질적 심연으로 이어진다.
첫째, 사회적 법규의 한계를 보완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배트맨은 고담시의 부패한 경찰과 사법 시스템이 해결하지 못하는 범죄를 소탕한다. 종규 역시 인간 세상의 법으로 처단할 수 없는 영적인 악, 즉 병마와 귀신을 다스린다. 둘 다 '정식 관리'가 아니거나 관리의 길을 거부당한 채, 밤의 영역에서 독자적인 정의를 집행하는 자경단(Vigilante)의 성격을 띤다.
둘째, 비극을 통한 각성이다. 브루스 웨인은 부모의 피살을 목격하며 배트맨이 되었고, 종규는 사회적 차별에 의한 자결을 통해 신성(神性)을 얻었다. 이들은 자신의 상처를 개인적 원한으로 소모하지 않고, 세상의 고통을 줄이는 공적인 에너지로 승화시켰다.
셋째, 도구의 신성화이다. 배트맨이 배타랑(Batarang)과 첨단 장비를 통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듯, 종규는 '칠성검(七星劍)'이라 불리는 보검을 통해 악귀를 제압한다. 이 장비들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각자의 정의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된다.
4. 중국 도검문화 속에 깃든 박쥐의 영혼
종규의 박쥐 상징은 중국의 무기 제조 기술과 도검 문화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고대 중국의 장검, 특히 도교적 색채가 강한 검들을 살펴보면 검의 코등이(호구)나 칼집의 장식에 박쥐 문양이 세밀하게 조각된 것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왜 전사의 무기에 연약한 박쥐를 새겼을까? 이는 검의 본질에 대한 동양적 해석 때문이다. 검은 기본적으로 살생을 위한 도구이나, 종규의 가호 아래 있는 검은 '살인검'이 아닌 '활인검(活人劍)'이자 '벽사의 법구'가 된다. 검을 휘두르는 행위는 파괴가 아니라 복을 불러오기 위한 청소 작업이다. 검에 새겨진 박쥐는 이 무기가 사용되는 순간, 재앙은 물러가고 오복(수, 부, 강녕, 유호덕, 고종명)이 깃들 것임을 약속하는 신성한 보증서와 같다. 이는 현대의 군인들이 부대 마크에 상징물을 새기며 필승과 생존을 기원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5. 무당검법의 비전(秘傳), ‘한복래지(恨福來遲)’
종규와 박쥐의 서사가 가장 역동적으로 살아 숨 쉬는 지점은 바로 중국 무술의 성지, 무당산의 검법이다. '무당 태을현문검법'에는 '한복래지(恨福來遲)'라는 초식이 존재한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복이 늦게 오는 것을 한탄한다"는 뜻으로, 살기를 뿜어내는 검술 초식치고는 매우 문학적이고 서정적이다.
그러나 이 초식에 담긴 내의(內意)는 결코 유약하지 않다. 이는 종규가 모든 악귀를 물리치고 주변을 정화했음에도 불구하고, 복을 가져와야 할 박쥐(복)가 기척이 없자 "왜 이리 늦게 오는가!"라며 안타까워하는 종규의 심정을 검술 초식에서 형상화한 것이다.
무술적으로 이 초식은 대개 '발운견일(구름을 헤쳐 해를 본다)'이라는 강력한 방어 및 반격기 뒤에 이어진다. 수행자는 이 동작을 취하며 다음과 같은 철학적 결단을 내린다. "복이 오지 않음을 한탄만 하지 않겠다. 내 검으로 남은 장애물을 완전히 걷어내어 복이 올 길을 강제로라도 열겠다." 이는 운명론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와 실력으로 평화와 승리를 쟁취하겠다는 능동적인 히어로 정신의 발로다.
6. 오키나와 가데나 미군 기지의 박쥐 문양
박쥐가 가진 '밤의 수호자' 이미지는 현대에 이르러 가장 강력한 무기체계인 전투기와 결합한다. 일본 오키나와 가데나 미공군 기지에 주둔하는 제18비행단 소속 제44전투비행대대(44th Fighter Squadron)가 그 예다. 이들의 별칭은 '뱀파이어 뱃(Vampire Bats)'이며, 부대의 상징 역시 박쥐다.
놀라운 사실은 이 기지의 활주로 끝단에 거대한 박쥐 문양이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히 부대의 자부심을 나타내는 표식을 넘어, 동양적 관점에서 보면 현대판 종규의 박쥐와 다를 바 없다. 보이지 않는 적(악귀)을 레이더(초음파)로 탐지하고, 어둠 속에서도 정확하게 타격하는 전투기의 특성은 박쥐의 생태와 완벽히 부합한다. 활주로의 박쥐는 이 하늘의 기사들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올 때, 그 터전이 안전과 복락으로 가득하기를 바라는 현대적 의미의 '구사영복'이라 해석할 수 있다.
7.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동양의 배트맨' 종규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구마대제 종규와 배트맨은 '박쥐'라는 공통의 매개체를 통해 악에 대항하는 인간(혹은 신)의 의지를 대변해 왔다. 배트맨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이면에서 고군분투하는 고독한 영웅이라면, 종규는 오랜 세월 동양인의 무의식 속에서 재앙을 물리치고 희망을 견인해온 영적 지주였다.
특히 무당검법의 '한복래지(恨福來遲)'가 주는 함의는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복이 늦게 옴을 탓하기보다, 내 손에 들린 검(실력과 의지)을 갈고 닦아 복의 통로를 가로막는 구름을 걷어내라는 가르침은 종규가 시대를 넘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종규는 배트맨의 고전적 전형이자, 박쥐가 가진 긍정적 에너지를 극대화한 존재다.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어둠의 형상을 빌려 빛을 지켜내는 그들의 분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의'라는 가치가 결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웅변한다. 우리 마음속에 한 마리 박쥐를 품고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늦게 오는 복을 한탄하기보다 스스로 복의 길을 여는 구마대제 종규의 기세를 품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