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과 네온의 연대기
서울의 중심, 을지로3가.
한때 인쇄기 돌아가는 소리와 금속 깎는 비명으로 가득했던 이 노후한 공업 지대가 지금은 '힙지로'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젊은 세대의 성지가 되었다. 사람들은 왜 굳기 시작한 시멘트 냄새와 녹슨 철문의 삐걱거림 속으로 몰려드는가.
그들이 찾는 것은 단순히 맛있는 음식이나 술이 아니다. 그들은 '분위기'를 소비한다. 그런데 그 분위기의 실체를 파헤쳐 보면 묘한 기시감이 든다. 그것은 1980년대 홍콩 누아르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고, 21세기 초반 우리가 상상했던 디스토피아적 미래, 즉 '사이버펑크'의 한 조각 같기도 하다. 결국 생각은 을지로라는 물리적 공간에서 출발하여 세기말의 정서와 사이버펑크의 철학을 관통하고, 결국 "기술과 소외의 시대에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을지로의 골목은 기하학적이다. 수직으로 뻗은 빌딩 숲 사이로 혈관처럼 퍼진 좁은 길들은 홍콩의 구룡성채나 몽콕의 뒷골목을 연상시킨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홍콩다움'은 화려한 관광지가 아닌, 생활의 때가 절여진 '고밀도 삶의 현장'에서 온다.
재개발을 앞둔 도심 유흥가가 홍콩의 뒷골목 분위기를 띠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자본이 빠져나간 자리에 남은 노후화된 인프라는 그 자체로 거친 질감을 형성한다. 여기에 새로 입주한 상점들이 설치한 원색의 네온사인은 어두운 골목의 습기와 만나 빛을 산란시킨다. 이 시각적 대비—낡은 콘크리트와 첨단(혹은 첨단을 흉내 낸) 빛의 조화—는 우리가 영화 속에서 보았던 사이버펑크적 미장센의 전형이다.
을지로는 이제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과거의 산업화 시대와 미래의 포스트모던 감성이 충돌하여 만들어낸 '시간의 중첩 지대'가 되었다.
왜 세기말 분위기는 항상 사이버펑크와 연결되는가? '세기말(Fin de siècle)'은 본래 19세기 말 유럽의 데카당스적 분위기를 뜻하지만, 현대적 맥락에서는 1990년대 말 우리가 겪었던 기묘한 불안과 희망의 혼재를 의미한다.
사이버펑크는 이 지점에서 탄생한다. 기술은 신의 영역을 침범할 정도로 비대해졌으나, 그 기술을 향유하는 인간의 내면은 오히려 빈곤해진 상태. 사이버펑크의 핵심 철학인 "High Tech, Low Life"는 세기말의 정서적 기반이다.
거대 자본이 만든 네온사인은 눈부시게 밝지만, 그 빛이 닿지 않는 골목 아래 인간은 소외된다.
장 보드리야르가 설파했듯,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가짜(시뮬라크르)가 세상을 지배한다. 힙지로의 홍콩 풍경은 진짜 홍콩이 아니지만, 대중에게는 실제 홍콩보다 더 '홍콩스러운' 감각적 진실을 제공한다.
이미 상점가에서는 네온사인을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가 최근에 ‘네온사인’이라고 부르는 조명들은 옛날 기술인 네온이나 아르곤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며, ‘LED 네온 플렉스(LED Neon Flex)’를 이용하여 과거의 네온사인처럼 보이게 만들어진 현대의 산물이다. 현재의 네온사인 조명 자체가 복고를 위해 만들어진 현대의 기술이다.
이러한 세기말적 풍경은 우리에게 묻는다. 모든 것이 인공적이고 복제 가능한 시대에, '원본'으로서의 인간은 과연 존재하는가?
사이버펑크 장르의 걸작 <공각기동대>나 <블레이드 러너>는 일관되게 질문한다. 육체를 기계로 갈아 끼우고, 뇌의 기억을 데이터로 저장할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인간'이라 부를 것인가?
불교에서 말하는 ‘촛불의 비유’를 떠올린다. 촛불로 다른 촛불에 불을 붙이면, 새로 불붙은 불길은 이전 불길의 후손인가? 뇌의 기억을 다른 신체로 이전할 수 있다면, 이전되어 새로 태어난 사람은 같은 사람인가 아닌가?
아바타의 주인공 제이크설리의 인간 육체는 죽고, 나비족의 육신에서 눈을 뜬다. 나비족의 몸을 가진 제이크설리는 인간 제이크와 동일인 인가 아닌가?
을지로의 풍경은 이 질문에 대한 공간적 은유다. 낡은 인쇄소(육체)는 그대로인데 내부 조명과 콘텐츠(정신)만 바뀌었다면, 그 공간은 예전의 을지로인가 아니면 새로운 무엇인가?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디지털 네트워크에 우리의 자아를 업로드하고, SNS라는 가상 공간 속에서 또 다른 인격을 연기한다.
여기서 인간의 정의는 '생물학적 존재'에서 '의지적 존재'로 옮겨간다. 사이버펑크의 주인공들이 시스템에 저항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헤매듯, 을지로를 찾는 이들 역시 규격화된 도심(강남이나 잠실의 깔끔한 빌딩)에서 벗어나 무질서하고 거친 공간 속에서 자신의 '개성'과 '실존'을 확인하려 한다.
결국 힙지로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두 가지 경로를 따르게 된다.
하나는 '향수(Nostalgia)'다. 가보지 못한 시대나 장소(80년대 홍콩이나 90년대 세기말)에 대한 그리움을 시각적 장치로 달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실존적 자각'이다. 매끈하게 정제된 현대 사회의 가식에서 벗어나, 날것 그대로의 콘크리트와 현란한 조명이 충돌하는 불협화음 속에서 오히려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힙지로는 우리에게 말한다. 세상은 점점 더 인공지능과 가상 현실로 채워지겠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자극적이고 더욱 인간적인 '흔적'을 갈구할 것이라고. 낡은 벽면의 곰팡이와 화려한 핑크빛 네온이 교차하는 그 지점이 바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현주소다.
우리는 그곳에서 홍콩의 뒷골목을 보는 것이 아니다. 기술 문명의 찬란한 잔해 속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우리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