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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손 Sep 05. 2022

이런 통신 장애라면, 나도 겪어보고 싶은 걸

변한 것과 변치 않은 것, 영화 <프리퀀시>를 보고

지구 자기장의 교란인지 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오류로 30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와 주인공이 무선 통신을 할 수 있게 되면서 발생하는 일을 다룬 영화다. 30년 전 사고로 죽은 아버지를 살렸지만 그 여파로 발생한 더 큰 비극을 막기 위해 부자가 시공을 초월해서 분투하는 이야기. 더 자세한 내용은 스포가 되니까 여기까지만 공개하겠다.


나는 이 영화를 2008년 여름 방학, 학교 시청각실에서 봤다. 그땐 시청각실에서 DVD를 빌려 1층에 비치된 개별 모니터로 영화를 시청하는 게 소소한 낙이었다. 이 공간의 유일한 단점은 필터 청소를 제대로 안한 것 같은 에어컨을 무지 세게 틀어준다는 것. 때문에 나는 수시로 자판기에서 따뜻한 커피를 내려 손과 몸을 데워가며 영화를 끝내야 했다.


이제 와서 고백하건대, 실은 '시민 케인' 같은 현대 영화사에서 중요한 사료로 꼽히는 고전 영화 관람을 먼저 시도했었다. 나도 대학물 좀 먹었겠다, 부산에서 서울 입성했으니 촌년티 좀 벗어나야겠다 싶어 '있어빌리티'만 좇은 결과다. 결과는 처참했다. 초반 20분만 재생했다가 CD를 냉큼 빼 버렸다. 이게 왜 영화사에서 (혹은 저널리즘사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꼽히는지 텍스트로 익히 체득했자만(원래 토대 없이 있어빌리티만 추구하는 종자들은 사전조사에 발빠른 편이다) 온몸의 세포와(하다못해 죽어서 곧 떨어질 세포인 각질도) 뼈와 살이 영화 관람을 거부했다. 하는 수없이 그냥 내 취향에 부합하는 영화를 고르고 골라왔다. 그게 이 영화였다.


와. 솔직히 킬링타임용이라고 생각했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시공을 초월한 부자의 정의 실현'이라는 다소 진부란 소재를 이렇게 멋지게 다룰 수도 있구나. 하여간 미국 놈들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20세의 내겐 앞으로 예의주시해야 할 다른 대단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까보니 별로 대단하지 않은 게 대부분이었다만, 그땐 하나하나 직접 까봐야 직성이 풀렸다. 그렇게 이 영화를 잊어갔다.


2022년 9월, 초반 20분만 본 시민 케인과 전체를 다 본 프리퀀시를 엇비슷한 수준으로 기억하고 있던 나는 넷플릭스 추천 목록에 이 영화가 뜨자마자 잊고 있었던 시청각실의 묵은 에어컨 공기가 떠올랐다. 오. 프리퀀시. N년 동안 내 카드를 저당잡은 스타벅스의 마케팅 전략 말고 영화 프리퀀시는 정말 오랜만이구나. 34년간 거쳐왔던 것 중에선 대단한 편에 속해서 깜보와 함께 시청했다. 우리는 이내 애상감에 젖어들었다. 90년대 말 특유의 색감과 빛처럼 가슴 한 켠을 찌르고 들어오는 음향, 정겨운 뉴욕의 풍경(이렇게 말하니 뉴욕통 같지만 실은 뉴욕에 가본 적이 없다...그 옆 동네 뉴저지에 오래 살았던 깜보의 증언에 의하면 크게 달라진 건 없다고 한다). 변한 것만큼이나 변하지 않은 것도 많았다. 예컨대, 영화 속 여자 등장인물들의 눈썹은 요즘과 다르게 매우 얇다. 하지만 가죽 재킷에 보이는 미국인들의 광기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리고 14년 만에 같은 영화를 찾은 나도 변한 듯 변하지 않았다. 이젠 건강을 위해 자판기 커피를 먹지는 않지만, 여전히 있어빌리티를 좇느라 가랑이가 찢어질 것 같다. (시민 케인 다시 시도해볼까? 로즈버드!) 그때의 나는 운명을 믿었지만 지금은 확률에 더 의존한다. 물론 큰일을 앞두고 '오늘의 운세'를 확인하는 습관은 한결같다.


과거에 본 영화를 또 보는 건 아주 흔한 일이지만 이토록 깊게 상념에 빠진 건 또 오랜만이다. 이토록 많은 감정을 쏟은 영화가 하필 '미국 상업영화'라니, 있어빌리티 신도로서 약간 유감이기도 하다. 자아분열을 겪는 가운데 상상의 불길이 스물스물 피어오른다. 내가 30년 전 엄마나 아빠와 교신하게 된다면? 일단 둘째의 키가 예상보다 덜 자랄 수 있으니 성장 클리닉에 데려가라고 해야지. 아 그리고 최소 2년에 한 번은 건강검진을 받으라고 해야겠다. 엄마 아빠 또 고생하면 안 되니까. 마지막으로 비트코인을 사라고 신신당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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