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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손 Sep 05. 2019

뒤꿈치에 피가 나도 괜찮아

시부야케이와 FPM. 도시의 음악

https://youtu.be/dY0C00rhXVc


큰 옷가게에서 옷 구경하는 건 인터넷 쇼핑에 익숙한 내게 고역이지만 좋은 점도 있다. 바로 자라나 H&M, 에이랜드에서 틀어주는 노래가 굉장히 좋다는 것. 주로 가사 없는 라운지 음악을 재생해서 내가 마치 차도녀라도 된 양 의기양양하게 쇼핑하는 기분을 만들어준다.

오늘 오랜만에 명동 옷가게를 뒤적거리는데 익숙한 멜로디가 귀에 꽂혔다. 시부야케이 장인 중 하나인 프리템포의 곡이었다. 와 고등학생, 20대 초반에 정말 많이 들었는데. 프로 구닥다리러는 연어처럼 플레이리스트를 거슬러 올라갔다.

시부야케이는 일렉트로니카와 재즈 등 여러 요소를 가미한 음악 장르다. 이름처럼 도쿄에서 유행했겠지. 도시에서 탄생했으니 곡 분위기는 도회적일 수밖에 없다. 시부야케이는 2000년대 초반에 워낙 인기를 구가했던 장르라 관련 뮤지션도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나는 그 중에서 판타스틱 플라스틱 머신(이하 FPM)을 가장 좋아했다.

FPM을 떠올리니 런던 여행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런던은 내가 처음으로 혼자 떠난 해외 여행지다. 초, 중학교 때 부모님따라 뉴질랜드와 중국에 다녀왔지만 그건 논외로 하겠다. 처음 ‘홀로’ 떠난 해외여행의 기억은 각별한 법이니까.

예나 지금이나 BGM에 집착했던 나는 여행을 떠나기 전 MP3 목록부터 갈아엎었다. 30곡 남짓 넣을 수 있었기에 고심해서 노래를 골라야했다. 마드리드에 정착하기 전 3박 4일 동안 런던에 스탑오버 여행을 할 계획이었기에 ‘런던’에 어울리는 노래를 찾아야 했다. 그렇게 고심해서 고른 곡 중 하나가 FPM의 city lights다.

“저 많은 빛들 중 나 하나 정착할 곳은 왜 없을까” 야경 볼 때 무조건반사처럼 튀어나오는 대사다. 비단 한국인만의 정서는 아닌지 city lights의 가사에도 이런 대목이 나온다. ‘Oh so very frightened to be alone yet we do our best to keep a civil distance. City lights, although I love you sometimes hate with doubt’

이 같은 ‘도시의 빛’ 정서는 런던에서 조금 다르게 발현됐다. 뒤로는 테이트 모던을, 옆으로는 타워브릿지를 끼고 서있던 나는 뭐든 다 해낼 것 같은 근자감 풀충전 상태에 도달했다. 새로 산 닥터마틴에 쓸려 철철 피가나던 뒤꿈치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꼬꼬마 은혜는 city lights를 무한재생하며 ‘나도 저 깔쌈한 빛의 일부다’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마드리드에서 스페인어를 마스터하는 것을 포함해서. (애석하게도 그 목표는 수포로 돌아갔다)

https://youtu.be/WXCgHJAf9Ss


강력한 한방 덕분인지 마드리드에서 살았던 6개월 내내 FPM의 노래를 즐겨들었다. 틈틈이 덕질도 했다. 괄목할만한 점이 있다면 FPM이 루이비통과 일본의 팝아트 작가(속칭 오타쿠 아티스트) 무라카미 다카시와 콜라보레이션을 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물이 바로 Different colors 뮤직비디오다(https://youtu.be/WXCgHJAf9Ss). 세상에 시부야케이와 팝아트와 명품이 혼재된 종합예술이라니,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내가 FPM에 열광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구분짓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도시와 인간을 갈라놓지 않았고 예술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었다. 그러면서도 뮤지션이라는 정체성을 놓치지 않았다. 자기 스탠스를 견지하면서 융합에 뛰어는 일. 말이 쉽지 꽤나 용기가 필요한 작업이다.

런던에서 산 닥터마틴은 곰팡이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런던에서 만든 뒤꿈치의 상처도 수 십 켤레의 새신발이 뒤덮은 지 오래다. 그래도 기어코 닥터마틴을 새로 사서신고 다니는 나도 참 한결같다. 그 신발이 무겁디 무겁다는 걸 알면서 말이다. 사실 그때처럼 뒤꿈치가 심하게 다칠까봐 아껴 신었는데 내일 신어야겠다. 오랜만에 피 철철 흘리며 야경 구경 좀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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