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테니스가 있는 날이면 세수하지 않은 얼굴에 선크림을 치덕치덕 바르고 집을 나선다. 한바탕 치열한 게임을 치르고 나면 얼굴이 오염물 투성이가 되기 때문에 세수가 부질없다. 땀이 흐른 자리엔 소금기가 서리고, 눈가엔 눈곱이 말라붙어 있다. 간 밤에 꾼 꿈의 그림자마냥. 물론 코트 위에서의 시간은 꿈보다 더 달콤하다. 아침잠이 많던 내가 아침 2시간을 반납할 정도로 중독적이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일테다. 코트가 아니었으면 보다 정갈한 모습으로 만났을텐데, 우리는 서로의 민낯에 더 익숙하다. 이 사람이 색조 화장이 잘 받는 얼굴인지 음영화장이 잘 받는 얼굴인지는 관심사가 아니다. 패션 스타일도 알 바 아니다. 하지만 해가 뜨면서 모자 아래 가려진 얼굴이 눈에 들어올때마다 나는 그들의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집중하는 눈빛과 즐거운 순간마다 탄산처럼 터지는 미소 앞에선 그 어떤 장신구도 부질없다. 통기성이 좋아 몸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는 티셔츠가 코트 위의 드레스다.
테니스를 치면서 다양한 언니와 동생들을 사귀었다. 여고에 여초학과 출신인 나는 여성 공동체 특유의 포근한 감각을 안다. 여적여라는 말을 처음 접했을 때 시원하게 비웃을 수 있었던 것도 몸 안에 남아있는 그 감각 덕분이다. 다만 운동으로 연결된 여성 공동체 경험은 나도 처음인데, 이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싶을 정도로 벅차고 신난다.
코트 위에선 정말 다양한 일이 벌어진다. 선 하나를 두고 인이니 아웃이니 신경전을 벌이는 것은 물론, 게임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을 때 감정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이들 때문에 위화감이 조성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요소를 테니스의 본질이라 하는덴 무리가 있다. 오히려 좁은 공간에서 경쟁하다가 발생하는 보편적인 사건에 가까운데, 이런 다툼을 ‘나쁜 것’으로 치부하고 싶진 않다. 활활 타오르는 승부욕을 뒤집어보면, 테니스가 밑바닥의 감정까지 투입할 정도로 매력적인 스포츠라는 사실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과도한 승부욕이 부담스러운건 사실이지만, 공부와 일 말고 승부욕을 불태울만한 요소가 그다지 많지 않다는 점에서 테니스가 열정의 촉매제로 작동한다는 사실은 분명히 고무적이다.
무엇보다 코트 위의 전쟁이 끝난 후 피어오르는 온정의 현장이 나는 정말 좋다. 누군가는 제철 과일을 나눠주고 다른 누군가는 게임 중에 보여주지 못한 입담을 과시한다. 스포츠가 관계맺기의 절차를 생략해준 덕분에 우리들은 오래 알아온 친구처럼 웃으며 땀을 식힌다. 하루는 임신으로 배가 불룩한 분이 코트에 놀러온 적이 있다. 연배가 있으신 분이 그 분 옆에 앉아서 먹을 것을 챙겨주고, 출산 후 몸 관리법을 조곤조곤 알려주는 모습은 정말이지 사랑스러웠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가 생긴 후의 테니스 라이프를 구체적으로 걱정하기 시작했는데 저런 우군들과 함께라면 무난하게 헤처나갈 수 있겠다 싶었다.
김혼비 작가의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를 아주 재밌게 읽었다. 책을 통해 팀스포츠에 대한 로망이 생겼는데, 지금 그 로망을 충족하며 산다. 테니스가 희로애락의 주축이 됐으니까. 테니스의 인기에 대한 미디어의 분석은 대체로 맞지만 간과한게 있다. 멋진 비주얼 요소만이 인기의 중추가 아니라는 점이다. 테니스 공은 다루기 어렵고, 그래서 도전의식을 자극하며 그 도전의식을 파트너와 함께 불태워야 해서 고도의 팀워크를 요구한다. 이 과정에서 나를 비롯한 여성 테린이들은 새로운 차원의 사회 경험을 한다. 기존 사회에서의 계급이나 꼬리표 같은 건 철저히 배제한 채 오로지 실력과 매너로 인정받는 이 세상에서 내가 기존에 일군 것은 전혀 소용이 없다. 그래서 자유롭다. 그만큼 전제없이 함께 쏟은 땀으로만 정을 쌓을 수 있다.
어릴 적부터 팀스포츠에 익숙한 남성들은 이런 경험이 익숙할테지만 나는 이런 경험이 처음이다. 이 세계를 왜 이제 알았을까 싶을정도로 매혹적이다. 내가 사람을 좋아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한 지인은 지독한 내향인인 자신이 테니스에 푹 빠져, 자발적으로 코트를 잡고 사람을 모집하는 모습이 신기하다고 했다. 정말 공감가는 말이다. 테니스 모임은 보통의 사교모임과는 결이 다른 결합이다. 그리고 이 결합에 매료된 이들은 내향인, 외향인 따지지 않고 코트를 찾는다. 아침잠 많은 게으름뱅이였던 나 역시 코트 위의 자매님들이 그리워 아침 댓바람부터 부지런을 떨며 테니스 가방을 챙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