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갤러리가 있으면 좋겠다는 조언
우연인지 필연인지 요 근래 과학자를 인터뷰 할 일이 많았다. 개인적으로 과학자에 대한 동경심이 있다.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도 당장의 아웃풋을 낼 수 있는 직업 대신, 오랜 시간 스스로와 싸워가며 버텨야 빛을 볼까말까하는 일을 택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저마다의 가치관이나 목표의식을 토대로 연구 주제를 설정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과학 연구야말로 지식과 가치관과 상상력의 총체가 아닐까, 늘 생각했다.
최근에 만난 과학자 인터뷰이는 자기 분야에서 엄청난 업적을 쌓은 분이었다. 자신의 가설을 세상에 증명하는데 30년의 시간을 쏟아 그 분야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연구자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은 것에 대한 강한 긍지가 느껴졌다. 하지만 결코 성취에만 집중하지 않았다. 오히려 방대한 연구 주제에 비해 초라하고, 한계 투성이였던 자기 자신 때문에 초라함에 허덕였던 젊은 시절을 회고하는데 긴 시간을 할애했다. 내 부모님과 비슷한 연배에 이룬 것도 많으니 어른으로서 군림할 법도 한데, 나를 동등한 성인으로 상정하고 대하는게 느껴졌다. 나의 일에도 근원적인 고충같은게 있지 않냐며 공감을 요청하면서.
공식적인 인터뷰가 끝나고 노트북을 닫는 순간부터 우리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됐다. 어릴 적 1등을 놓치지 않았던 그에게 주변은 늘 다른 직업인이 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과학자라는 꿈이 너무 공고해서 흔들린 적은 없지만 큰 업적을 이루기 전까지는 안타까움을 샀다고 한다. '큰 돈을 벌 수도 있을텐데, 왜 연구실에 틀어박혀 사니'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고 한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대부분의 불행은 판에 박힌듯한 비슷한 삶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저마다 다른 길을 걸으면 어떤 성취를 이루든 진심으로 응원해줄 수 있을텐데, 비슷한 목표를 위해 정해진 길을 걷고 있어서 질투와 시기가 난무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상상력의 울타리 밖에는 질투가 자리할 곳이 없다. 타인의 성취가 어느 수준인지 가늠할 수 있고 당장 손에 잡힐 것 같은 가시성이 서로의 격차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때때로 그 격차가 누군가를 좌절하게 만든다.
우리나라에서 많은 과학자는 '넌 이만큼 공부를 잘했으니 이만큼의 삶을 누릴 수 있어' 식의 방정식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산다. 괄목할만한 발견을 했다면 웬만한 사업가 못지 않은 부와 명예를 누리지만 상당수는 '나는 그동안 무엇을 위해 연구했나. 이룬게 있기는 한가'라는 자괴감과 함께 실험실을 떠난다고 한다. 유형의 성취가 담보되지 않은 그들의 선택이 누군가에겐 무모해 보일 수도 있겠다.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 뾰족한 선호 없이 '좋은 것'만 좇고 살다가 30대 중반에야 내게 필요한 뾰족한 것이 뭘까 탐구하는 내게, 그와의 만남은 자극제가 됐다. 그러고보니 이전에 만난 다른 과학자 분은 내게 세속적인 성취가 아닌, 인생의 꿈이 있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그의 꿈은 자신만의 갤러리를 짓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내 미래에도 그런 갤러리 같은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어른들에게 '서울이나 분당선 외의 지역에선 집을 사지 마라', '아이는 가지는 게 좋다'는 현실적인 조언은 많이 들었다만 그런 몽글몽글한 조언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공명심은 훌륭한 동기지만, 내 이름을 어떤 콘텐츠로 채울지는 철처히 내 몫이다. 앞으로 내 집 마련은 어떻게 하며, 월급을 어떻게 운용할지 같은 현실적인 고민을 내려놓을 순 없지만, 내 인생의 테마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정도는 생각하고 살아야 겠다. 어느 동에 살던 누구보다는 무엇을 남긴 누구 혹은 무엇에 몰입하던 누구로 기억되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