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효녀의 고백
유행에 빠른 사람은 아니지만 남들보다 앞서 구매한 물건이 있다. 바로 MP3다. 음원 파일을 다운받아 음악을 재생하는 기기의 존재가 희박했던 2000년대 초에 이름 모를 회사의 MP3를 구매했다. 금속 처리된 표면에 직사각형 형태의 못생긴 외양이었다. 그래도 내겐 일상의 혁신같은 존재였다. 더이상 앨범 트랙의 목록을 외울 필요도 없고, 좋아하는 곡만 추릴 수 있었으니 최초의 ’은혜 큐레이션‘쯤으로 명명해도 되겠다. 취향을 털어놔도 민망하지 않은 친구와 아파트 벤치에 나란히 앉아 음악이 소환한 심상을 공유했던 기억은 마음 어딘가 소중히 자리잡고 있다.
유행에 앞섰다는건, 그 유행이 주류가 됐을 때 내 것이 낡은 것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고등학생이 됐을 때 대부분의 친구가 MP3를 사들였고, 아이리버 같은 메인 브랜드가 시장을 점유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인지도도 낮고 디자인도 구린 내 MP3를 창피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하루는 내 MP3를 빌려간 친구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은혜야 이거 이상하다. 작동이 안된다. 나는 옳다구나! 바꿀 때가 됐다며 흔쾌히 MP3를 돌려받았다.
곧장 아빠에게 달려가 고쳐달라고 떼를 썼다. 바로 사달라고 하는건 노골적이니까 일단은 손부터 봐달라고 꾀를 부린 것이다. 이쪽(?) 전문가가 아닌 아빠가 죽은 MP3를 소생시키는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빠가 난색을 표하며 못고치겠다고 선언한 순간 나는 사주지도 않을거면 빨리 고치라고 압박했다. 되바라진 딸의 언사에 화가 난 아빠는 MP3를 부숴버렸다. 그 순간 눈물이 터져나왔다. 바꾸고 싶었지만 이런 방식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정든 녀석인데 참혹한 결말을 초래한 내가 싫고 아빠가 죽도록 미웠다. 그때 내 인생 처음으로 아빠와 크게 싸웠다.
냉전은 꽤 오래 갔다. ‘갈등 당사자 주의자’인 엄마가 중재에 나설 정도였으니까. 어느 토요일 낮에 엄마가 나를 불렀다. 아빠도 심했지만, 은뽕이 니도 너무 경솔했다. 그래도 고칠라고 노력했다이가. 아빠한테 사과해라. 그대로 아빠에게 쪼르르 달려간 나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잘못했다고 사죄했고, 그 자리에서 눈물 콧물을 왕창 쏟아냈다. 감자가 울면 아마 그런 모습이었을거다. 아빠는 아빠도 미안했다고 우는 감자를 안고 다독여줬다. 내 호흡이 진정됐을 때 아빠가 웬 상자를 건넸다. 열어보니 신상 아이리버 MP3였다. 쌔끈한 빨간색에 첨단 기기처럼 보이는 매끈한 자태. 나는 꿈인지 생시인지 몰라 잠깐 정신줄을 놨다가 다시 우는 감자가 됐다. 두번째 MP3와의 우정은 대학생때까지 이어갔다.
어제 잠들기 전에 별안간 이 일화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사이 참 많은 게 변했단걸 깨달았다. 스트리밍 서비스가 대두된 후 무수히 많은 은혜 큐레이션을 생성하면서 각 큐레이션은 희소성을 잃었다. MP3는 일상의 혁신이 아니라 레트로 매체가 되고 말았다. 소중한 이와 귀 한쪽을 양보해 음악을 공유하는 시간도 일상에서 사라졌다. 이제는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을 공유하지만 음악을 배경음악 삼는 것과 그것에 몰입하는 일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행동이다.
가장 많이 달라진 건 아마 아빠와 나의 관계가 아닐까 싶다. MP3를 고쳐내라고 악쓰던 감자는 부산 본가에 가면 아빠에게 필요한 앱을 깔아주고, 이용법을 알려주는 매뉴얼이 됐다. 신상을 사달라고 떼쓰던 감자는 이제 아빠의 인터넷 쇼핑을 대행해주는 퍼스널 쇼퍼가 되기도 했다. 사실 대단한 효녀는 아니라서 그런 일이 귀찮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아빠도 지자체에서 하는 디지털 교육 같은거 들으라고 준엄하게 꾸짖은 적도 있다. 어제 기억을 헤엄치다 최근 부모님에게 무심했던 내 모습이 파도로 돌아와 나를 때렸다. 아프고 차가웠다. 첫 MP3가 시대에 뒤처지는걸 인식한 후부터 그것을 숨기고 싶어하는 과거의 내 모습이 부모님을 대하는 지금의 나와 겹쳐보였다. 비록 구닥다리에 성능은 떨어졌지만 내게 근사한 추억을 안겨준 유일무이한 첫번째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