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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손 Jul 12. 2017

캠퍼스와 통기타의 위험한 유착관계

첫사랑 청문회

https://youtu.be/6inwzOooXRU


“선생님 첫사랑 이야기 해주세요.”
여고와트를 관통하는 마법의 주문이다. 중간고사 후 진이 빠져버린 늦은 봄날, 혹은 더위가 눈꺼풀을 무겁게 잡아당길 무렵 나와 급우들은 매 교시 선생님을 대상으로 첫사랑 청문회를 열었다. 시간도 끌고 선생님의 구남친 구여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니 일타쌍피다. 해묵은 방법이지만 시도만으로도 가치 있다. 페이스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내가 왜 이 청문회에 응할 수 없는지’를 설명하는 선생님조차 최소 5분은 변명하는데 할애하고 말거든.

느지막하게 일어난 어느 아침, 익숙한 가사 하나가 귀를 간지럽혔다. Why do birds suddenly appear every time you are near. Just like me, they long to be close to you. 카펜터즈의 close to you다. 워낙 유명한 노래라 스칠 풍경과 기억이 많을 법하지만 한 선생님의 해사한 얼굴만이 내 머리를 차지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나, 첫사랑 청문회에 흔히 응했던 (당시)20대 영어 선생님의 수줍은 미소.

이야기는 서사보다 인상으로 기억된다. 선생님은 노래로 사랑 이야기를 시작하고 매듭지었다. “학교 선배랑 사귀었었는데, 내한테 노래 불러줬던 게 젤 많이 생각난다. 그 노래 가사가 그런거 거든. 당신 있는 곳에 새가 나타나고 별도 떨어지고..나처럼 걔네들도 니 옆에 있고 싶어요 뭐 이런...” 선생님의 옛사랑이자 선배란 사람은 기타를 치며 이 노래를 불러줬다고 한다. 달달 간지러운 노래의 정체는 바로 카펜터즈의 close to you 였다.

첫사랑 이야기 해달란 주문은 40여 마리의 비글들을 순식간에 이름 모를 캠퍼스로 순간이동 시켰다. 어느 풀밭에서 붉게 상기된 얼굴로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 부르는 청년과 그 옆에서 노랫말을 기억 바구니에 차곡차곡 담고 있을 영어 선생님의 모습. 비글들은 두 청춘 남녀의 실루엣을 0.1평어치의 허공에 그리며 달콤한 상상에 빠졌다. 견고히 닫아 둔 기억의 문에 틈이 생겼는지 선생님은 시선을 창밖으로 옮기셨다.

시대를 초월한 캠퍼스와 통기타의 유착관계 덕분인지, 20대 들어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선생님의 선배 같은 초월적 존재는 없었지만) 친구들과 노천극장에 둘러 앉아 기타치고 노래하던 기억이 아직 선연하다. 노천극장 통기타 18번곡 creep부터 제이슨 므라즈의 각종 히트곡들. 아 레이디 가가의 born this way를 재열이 기타에 맞춰 부른 적도 있다. 지금은 넓고 평평한 잔디밭이 되고 만 구 노천극장 터엔 이토록 많은 노래와 기억이 매몰 돼 있다.

나이가 서른 줄에 육박했지만 노래 구절 한 줄에 마음이 쁘띠첼처럼 말랑해지는 거보니 아직 건재 하구나 이놈의 여고생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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