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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손 Jul 13. 2017

세입자의 서러움

변기 덕에 생물학적 나이와 사회적 나이에 균열 생긴 썰

나랑 룸메이트는 지난해 11월부터 같이 살았다. 오래 알던 사이도 아니어서 주변 사람들이 많이 걱정했는데 사이좋게 잘 지낸다. 종종 혼자 살고 싶을 때도 있지만 룸메이트와의 갈등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토록 평화로운 동거 비결은 싸움을 싫어하는 우리 둘의 성격 덕분이었으리라.

 나도 워낙 평화주의자라 정말 부당한 일이 아니면 화를 잘 안내는데 같이 사는 친구는 천사 그 자체다. 얼마나 착하냐면 종종 ‘혹시 내가 툭 내뱉은 말에 이 친구가 상처받은 적은 없겠지?’하고 정기 자기 검열을 하게 만들 정도. 내가 최종 면접에서 떨어지고, 이별을 겪을 때 옆에서 조용히 위로하고 본인이 취업 했을 땐 규카츠를(그것도 더블로) 쏠 줄 아는 다정함까지 갖췄다. 인디 밴드를 좋아해서 가끔 공연에 나를 데리고 가기도한다. 여러모로 고마운 친구라 나도 좋은 동거인이 돼야겠다 생각한다.

헌데 오늘, 평화주의자 두 사람의 입에서 고성이 튀어 나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서로를 향한 건 아니었다. 집주인 때문이었다. 집 변기가 고장이 났는데 정화조 문제인 것 같았다. 우린 당연히 주인  아주머니를 호출했다. 아주머니는 처음엔 걱정하는 척 하더니 점차 본색을 드러냈다. 수리비를 내기 싫었던 건지, (본인 소유인) 집의 허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건지 갑자기 우리한테 화살표를 돌리기 시작했다. 아가씨들이 생리대 같은 거 변기에 막 넣은 거 아니야? 머리카락 변기에 버렸지? 아가씨들 집 더럽게 쓰지?

와나. 대학교 3학년 땐가 방에 개미가 들끓는다고 하숙집 할머니한테 항의했다가 ‘아가씨가 과자 많이 먹어서 그래’라는 명답에 꼭지 돌았던 이후로 가장 나를 화나게 만든 답변이었다. 하필 밖에 있어서 전해듣기만 했는데 그 말을 직접 들은 룸메이트가 많이 당황한 것 같아서 전화로 아주머니를 바꿔달라고 한 다음에 한판(?)했다. 아주머니 내가 돈 아까워서 이러는 줄 아냐고, 근데 다짜고짜 우리가 더러워서 그렇다니 그렇게 말하면 누가 기분 좋게 듣겠냐, 게다가 아주머니는 이 집 주인이니 관리할 의무가 있지않냐, 내가 무리한 요구 한거냐고. 그랬더니 돌아온 말은 ‘아가씨들 아직 어른이 아니라서 말이 안 통하네. 어른이랑 통화하게 그쪽 어머니(공인중개사인 룸메이트 어머니는 가끔 우리를 대리해서 문제해결 해주신다)랑 이야기해볼게‘. C-BAL!!!(욕 죄송) 생물학적 나이와 사회적 나이가 고작 변기 때문에 부조화를 이루다니 기적적인 세상이여!!!

결국 착한 내 룸메이트는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 광경을 지켜 본 수리공 아저씨도 ‘그냥 조심하라고만 말하면 될 걸...’이라고 구시렁댔단다. 아줌마는 고작 10만원 때문에 어린 여자애 눈에 눈물 맺히게 한 게 미안했는지 혹은 익명의 수리공 앞에서 악덕 집주인으로 보이는 게 민망했던지 나중에 룸메이트한테 사과했단다. 룸메와 비교해 덜 평화주의자인 내가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게 못내 한스러웠다. 빡칠수록 논리적으로 변하는 병에 걸려서 말로 이길 자신 있는데. 쨌든 ‘세입자의 서러움을 몸소 느껴서 눈물이 났다’는 룸메의 말에 마음이 아팠고 집중력에 균열이 생기고 말았다. 오늘 야식으로 우리 룸메 곱창 사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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