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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손 Jul 12. 2017

흥부자의 속내

어쩌면 관성일지도 모를 유희

아무래도 조울증인 것 같다. 미친애처럼 웃다가 급울적해졌다가 오락가락한다. 어제 A와 만나 조울 시너지를 제대로 경험했다. 우리는 짜장면 맛과 맥주의 청량함에 기뻐하고 서울로에서 그루브 타는 고딩에 열광했다가 늪 같은 현실에 자조했다. 짧은 시간 이 사이클을 무한 반복했다.

"아 춤추고 싶어." 내가 습관처럼 내뱉는 말 베스트 5 중 하나다. 원체 흥이 많다. 몸치지만 춤추듯 걷는 게 일상이니까. 뱉은 말에 소명의식을 느낀 나는 스탭을 밟으며 걸었다. 내가 구한말에나 유행했을 셔플댄스 곡 퐈리 롹 앤썸을 흥얼거리자 A가 한술 더 뜬다. "언니 EDM은 2010년 언저리에 나온 게 진국이죠"

2010년이라.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호랑이가 내뿜던 곰방대 연기 속에 아련한 풍경 하나가 펼쳐진다. 새내기 B가(차도녀st인 B의 앳된 스무살이라니 상상할 수 없다)이 위 노 스피크 아메리카노를 틀어놓고 빠빠메리카노를 흥얼대며 과방에서 동아리 대자보 그리던 시절.

그다음 떠오르는 건 2011년 유럽 전역을 강타한 덕 소스의 히트곡 바바라 스트라이샌드의 유쾌한 전주다. 불현듯 라면죽이라는 고나트륨의 축복을 배운 가난한 마드리드 유학생 시절이 떠오른다. 변호사 출신 집주인의 교묘한 계략으로 보증금 백 만원을 뜯긴 아픈 기억도 추가요.

2012년엔 폴란드 밴드 어큐렛의 디스코테카 그라라는 곡이 인기였다. 클럽, 술집, 옷 가게 어딜 가나 이 노래가 흘러나왔으니까. 런던 올림픽 축구 경기가 있던 날, 기어코 밤을 새고 말았던 홍대에서의 하루가 떠오른다. 그날 밤 술집과 클럽에서 이 노래가 적어도 다섯 번은 재생된 듯하다. 내가 89라고 하자 넘나 누님이라며 놀랐던 한 남자애(그는 같이 놀자고 조르다가 내 나이를 듣더니 잠깐 흠칫-했었다.) 미안한데 네 액면가는 이미 삼십대 중반이었어 임마.

EDM 석자가 지난 기억들을 헤집는다. 잊은 줄 알았던 무의식의 파편들은 춤추듯 걷는 2017년의 내 혈관을 타고 순환 운동을 한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기억하는 감각들. 울적해 죽겠는데 세상만사가 짜증 나 죽겠는데 자꾸 신이 난다. 목을 껄떡대며 서울로를 휘젓고 남산 타워 불빛을 미러볼 삼아 소월로를 오른다.

문득 춤을 멈추고 싶어 발목을 자르고 마는 동화 빨간 구두의 잔혹한 결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나의 흥이란 게 고달픔을 달래기 위한 방어기제였다가 관성처럼 굳고 만 건 아닐까. '흥'을 구성하는 감정의 핵이 참인지 거짓인지 잠깐 생각하다 고민하기를 관두기로 했다.2010년이든2011년이든 2012년이든 2017년이든 2027년이든 나는 계속 흥부자로 살 테고 언젠가 이 행동양식이 나를 댄싱머신으로 만들어주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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