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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손 Oct 19. 2017

가을 옷자락의 비밀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https://youtu.be/3zrSoHgAAWo


“아 진짜 연애하기 좋을 때다”
밤길을 함께 걷던 친구가 투덜거렸다. 나도 동의했다.
이상하다. 더운 여름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왜 가을이 되니 공복을 느끼듯 옆구리가 시린 걸까. 뚝 떨어지는 기온에 맨몸을 맡길 수 없다는 신체 방어 기제인가 아님 ‘가을=낙엽=우수수=우수에 젖음=쓸쓸함=고독을 함께 극복할 짝꿍 찾아염’이라는 (진부한) 사회 공식의 무의식적인 발현인가. 가을에 연애욕이 치솟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던 나는 나름의 결론을 내리곤 친구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답은 가을 옷자락에 있었어”

사람에게 반하는 몇 가지 포인트가 있는데 가을 옷자락에서 은근하게 풍겨오는 냄새가 그 중 하나다. 얇은 여름옷에선 땀 냄새가 나고 두꺼운 모직 코트나 오리털 패딩은 모든 궤적의 냄새를 담고 있어 역할 수 있는데 가을 옷은 필요한 향만 담고 있다. 잔향만 남은 향수 냄새는 달달하고 독기가 빠진 담배 냄새는 중후하다. 이런 저런 기체들이 10월의 대기와 맞물려 옷자락에 안착한 그 냄새가 그리 좋았던 나는 이맘때면 애인의 옷에 코를 박고 킁킁대기 일쑤였다. 아무렴 가을은 반하기 쉬운 계절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누군가에게 반하거나 사랑에 빠지는 거, 의지의 영역은 아닌 것 같다. 고등학생 때 미술학원에 다녔던 친구가 자기 그림을 고쳐주던 대학생 알바 선생님의 손등의 핏줄과 옅은 스킨 냄새에 반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 친구는 나중에 그 대학생과 영화도 같이 보게 됐는데 정작 데이트를 하고 나니 감흥이 깨지더란다. 손등의 핏줄과 스킨냄새라는 환상을 걷고 나니 어리버리한 20살짜리만 보였다고.

나 역시 잘 보이고 싶은 상대를 만나기 전에 종일 거울보고 화장을 고치는 등의 노력을 쏟는다. 그러다 잘 안 되면 괜히 뻗친 왼쪽 머리카락을 원망하지만 화장이나 머리 때문에 엇갈린 게 아니라는 거 암묵적으로 인정한다. 결정적인 순간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오는지 모르는 거라 예측하려 애쓰다가 계획대로 안 되면 본인 마음만 다친다는 교훈도. (오늘 내가 고봉밥을 먹은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불가항력과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가을 옷자락은 분명 비교우위를 지닌 무기다. 10월에 괜히 옆구리가 시리고 쳇 베이커를 무한재생하게 만드는 이유의 팔 할은 가을 옷자락에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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