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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손 Dec 02. 2017

수미상관의 덫

가혹했던 아홉수를 한 달 남기며

“변하지 않는 게 진짜 슬픈 거예요.”

영화 시네마 천국을 소개하던 허지웅이 이렇게 말했다. 작은 마을의 소년 토토가 도시로 떠나 성공한 감독이 됐다는 변화의 서사보다 슬픈 건 영화 초반부, 후반부에서 똑같은 대사를 읊조리며 광장을 배회하던 영화 속 동네 바보 아저씨의 한결같은 모습이라고. “이 광장은 내거야”라고 외치던 광인의 수미상관법은 ‘변한 것’과 ‘변함없는 것’ 사이의 헤게모니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적 장치이자 서사의 백미이기도 하다.

힘에 부치는 한 해였다. 3년 끝에 헤어졌다. 꿈꿨던 곳에 잠깐 몸 담았지만 아깝게 미끄러졌다. 난생 처음 끔찍한 인격 모독을 당했다. 결국 취직했다가 곧바로 퇴사하고 말았다. 실패와 부정에 너덜너덜해진 마음이 쉽게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좋은 퍼포먼스를 내고 싶어 용을 써도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기고 싶어 꼼지락 대던 예전 모습이 재현되지 않았다. 회복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부모님껜 죄송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타인에게 나를 증명하는데 골몰하다간 골로 갈 것 같았다.

그 동안 비교적 운 좋게 살아왔다. 크게 애쓰지 않고 입시를 봤고, 딱 그만큼의 대학에 들어가 무난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SKY 아니면 서울 가지 마라던 외할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상경해 부모님 도움으로 큰 어려움 없이 지냈다. 역시 부모님 도움으로 외국 생활도 해보고 해외여행도 다녀왔다. 간헐적 미친놈들을 제외하면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 외로움을 느낄 틈 없이 20대를 보냈다. 마음씨 고운 이들과 꽤 긴 시간 교제하며 예쁜 추억도 많이 만들었다.

헌데 망할 스물 아홉이 무난 마라톤에 제동을 걸었다. 일이 풀리기는 커녕 악재가 쌓여가자 어디 원망할 힘도 소진돼 무의 경지에 이르렀다. 디폴트로 돌아온 일상을 채우는 건 불안이다. 혼자 이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있을까. 누구는 결혼을 약속하거나 이미 결혼 했는데 난 다시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누구는 이직 하고 진급하는데 나는 밥값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세상은 이렇게 빨리 변하는데 왜 나는 망부석처럼 마냥 서 있을까.

나의 20대가 수미상관법으로 갈무리 될 까봐 덜컥 겁이 난다. 토토처럼 변화의 키를 쥐는 사람을 꿈꿨는데 지금 내 모습은 일생동안 광장만 배회하던 광인에 가까운 것 같아 초조하다. 이 불안감을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올해 또 찾아온 ‘연말 블루’ 정도로 치부하기엔 올 한 해 참 가혹하긴 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벌어진 상처에 빨간약을 발라야겠다. 좋은 음악과 책에 더 가까워져야지. 공적 글쓰기에도 다시 몰두 해야겠다. 수미상관보단 점층법을 택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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