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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손 Dec 05. 2017

평화의 모순

희생을 배태하는 통합

“솔직히 웃긴데 호모포비아적 요소가 가득해서 웃으면서도 죄책감 느꼈어요”
 
예뻐하는 동생과 연극 한 편을 보고 왔다. 연극이 끝나고 공연장을 나서는데 동생이 내 생각과 같은 말을 해서 놀랐다. 아슬아슬한 유머코드에 박장대소 하다가도 ‘아 나 썩었다. 아직 멀었어’라며 수백 번 유희와 정치적 올바름 사이를 방황했었다. ‘겨우 두 시간짜리 연극인데 뭐 그리 빡빡하게 굴어’와 ‘조롱이 누적되면 관성이 되고 그 관성이 타자를 죽이는 칼이 될 수도 있어’의 싸움이랄까. 여유는 더 가진 자의 전유물이 아니었던가.  

문득 이런 고민 자체가 고무적이란 생각도 들었다. 몇 년 전의 나였으면 신나게 웃다 잊었을 거다. 대중문화에서 흔히 소비되는 성 소수자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그들을 기억하고 인식했겠지. 그러나 이 이슈가 공론장에 오르면서 자기 검열이 시작됐다. 가장 큰 변화는 그들의 ‘행동양식’을 굳이 읽고 파헤칠 것도 없이, 그저 사회 구성원이자 삶의 주체로 대하는 태도의 전환이다. 행동 양식을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타자화의 첫 단계라는 연유에서다. 성 소수자라는 한 가지 잣대로 그의 행동양식을 예측하는 건 당사자의 다른 가능성과 가치를 짓밟는 폭력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기시감도 들었다. 무려 ‘세상의 반’인 여자라는 이유로 행동양식이나 깜냥을 재단 당하는 일 말이다. ‘그 회사 연봉 지지배들이나 받을 수준이다’, ‘여자가 무슨 피디, 기자냐 그냥 공무원이나 해라(공무원 디스 아님)’, ‘여자애들 지들끼리 칭찬하고 그러는 거 못 봐주겠다’, ‘뭔 여자가 이렇게 기가 세’, ‘여자가 그렇게 걸걸하게 말하다니 진짜 깬다’ 등. 학교 다녔던 4년 6개월 내내 따라붙던 말풍선들. ‘여자가~’란 가정 없이는 대화를 이끌어갈 줄 모르는 상상력 고갈의 종자들. 애석하게도 그들과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게 한때 내 일상이었다.

더 싫은 건 부조리와 모순에 순응하던 과거 내 모습이다. 내가 저 사람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을까봐, 저 사람들에게 여자로서 매력 없어 보일까 주의를 기울이다 감정소모 했던 못난 시절 말이다. 왜 나는 객체이길 자처했을까. 김승옥 단편을 읽다 불편함을 느껴 책을 던져버리고 빡친 맘에 관련 기사를 찾아보는 지금으로선 상상도 못할 일이다. 사람은 교육과 훈련을 통해 각성할 수 있다. 내가 인간에게 갖는 최소한의 기대다.
(참고기사: http://www.hankookilbo.com/v/2149dc82c5e34c6584b90196107c557a,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786253.html)

나도 싸우는 거 싫다. 그리고 남자 좋아한다. 하지만 타자의 희생과 침묵을 배태하는 평화의 방법론엔 동의할 수 없다. 갈라진델 봉합하고 싶다면 분열 이전의 평화가 진정한 평화상태였는지부터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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