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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손 Feb 05. 2018

닭발

내 인생의 화이트리스트


친구들 사이에서 ‘거장’이라고 불린다. 가리는 음식이 없다고 붙여진 별명이다. 내가 생각해도 못 먹는 게 없다. 페이스북에서 떠돌던 섭취가능 메뉴 테스트하면 베어그릴스 등급 나올 정도. 가끔 같이 밥 먹을 사람이 “너 뭐 못 먹는 거 있어?”라고 물어보면 농담 반 진단 반으로 화부터 낸다. “아직도 날 모른단 말야?”. 그래서 메뉴를 고를 때 상대를 더 고려한다. 그렇게 데이터를 차곡차곡 모으다 보니 호불호가 극히 갈리는 모세의 기적류의 메뉴가 몇 가지 있다. 닭발이 대표적이다.

입을 경유하는 거의 모든 것을 사랑하지만 닭발에 대한 애정은 유독 각별하다. 대다수의 음식은 언제 처음 먹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닭발만큼은 생생하기 때문이다. 때는 초등학교 5학년, 카드캡터 체리의 마법과 신화 이민우의 은빛 머리칼에 동시에 가슴 뛰고 권선징악과 가정이라는 울타리 밖 세상과 간헐적으로 조우하기 시작한 나이. 나는 한 친구와 여름방학을 계기로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방과 후면 그 친구 집에서 간식을 먹고 신화 동영상을 봤다. 나에게 집 평수와 아버지 직업을 묻지 않았던 친구 어머니와도 가까워졌다.

하루는 친구 집 부엌 베란다 문이 깨져 있길래 왜 저렇게 됐냐고 물어봤다. 친구는 천진하게 답했다. “몰라 아빠랑 바람난 여자가 집에 다짜고짜 찾아와선 엄마랑 한바탕 싸우고 집을 저 꼴로 만들어놨어.” 난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다가 “미친 여자네”라고 답했다. 우리는 깨진 유리창을 금방 잊고 다시 신화 동영상에 빠져들었다. 곧 친구의 어머니가 집에 왔다. 간밤의 일을 들어서 그런지 괜히 아주머니가 수척해보였다. 아주머니는 날 반기더니 “은혜야 니 이런 거 묵나”라며 뭔가를 건넸다. 아주머니가 먹다 남긴 닭발이었다. 도전의식에 불타오른 나는 생애 첫 닭발에 도전했다. 아주머니는 무슨 어린이가 이렇게 잘 발라 먹느냐고 칭찬했다. 처음 먹어본 닭발은 씹히는 맛이 좋고 기분 좋게 매콤했지만 약간 차가웠다. 깨진 유리창을 헤집고 들어오던 가을바람처럼.

이후 닭발은 최고 애정하는 음식 중 하나가 됐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모의고사를 치고 난 날이면 종교의식처럼 차박사 얼큰이의 뼈 없는 닭발, 똥집튀김 반반을 시켜 시험에 지친 심신을 달랬다. 성인이 되고 나선 ‘닭발 리스트’에 등재된 친구들과 강남 팔당 닭발, 신당동 우정닭발 등등을 전전하며 매콤한 추억을 쌓아갔다. 애석하게도 사귀었던 사람들은 죄다 닭발을 못 먹었다. 어떤 이는 아예 시도조차 안했고 다른 이는 시도는 했으나 괴로워했다. 눈물 콧물 범벅에 입술까지 퉁퉁 부은 그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아 캡사이신과 젤라틴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연인이든 친구사이든 ‘닭발 취식 유무’는 하나의 기준이 됐다. 그것이 그들의 가치와는 무관하지만 먹을 줄 아는 이들에겐 동물적 유대감을 느낀다.

오늘 한 친구가 “언니 다음에 저랑 닭발 먹어요”라고 톡을 해왔다. 닭발 리스트에 새 이름을 올릴 수 있단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그곳이 한신포차든 신당동이든 우린 뼈를 발라내는데 집중하고 미뢰를 때리는 매운 맛에 바깥의 고민 따위 잠깐 잊겠지. 쿨피스 속 당분과 소맥의 알콜 덕에 광대는 승천 할 테고. 나는 닭발 동지와 그것을 못 먹는 이들에게 메뉴 선택권을 양보하는 법을 선물한 닭발에게 고맙다. 어린이라 못 먹을 거란 편견 없이 내게 닭발을 건넨 친구 어머니에게도 감사하다. 지금의 나는 만화 주인공의 마법과 가수의 은빛 머리칼에 가슴 뛰지도 않고 권선징악과 가정이라는 울타리 밖에 놓인 나이지만 깨진 창의 존재가 마냥 두렵진 않다.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깨진 부분을 친구와 함께 테이프칠해 바람이 들어오는 걸 막았을 텐데 이젠 연락이 닿지 않는다. 아주머니는 아직도 술안주로 닭발을 드실까. 내 닭발 리스트에  본인이 가장 먼저 이름을 올렸단 사실을 알고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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