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침투한 성폭력의 기억
#1. 고등학생 때 일이다. 나는 친구들과 스탠드에서 재잘대고 있었다.
마침 산책 나온 남자 선생님이 우리 옆에 왔다. 평소 내 당당한 말투를 칭찬하던 분이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서 떠드냐”며 우리 옆을 기웃거리던 선생님이 불현 듯 발로 내 엉덩이를 툭 건드렸다. 불쾌해진 나는 바로 대들었다. 선생님 왜 내 몸에 손대요. 우리 아빠도 내 몸에 손 못 대요.
돌아온 답은 빈정이었다. 그는 “그래 느그 아빠도 못 건드리는 그 귀한 몸 건드려서 미안하다” 사과 같지도 않은 사과에 얼빠진 나는 선생님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이후 그는 내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나의 당당함이 어른에게 함부로 대드는 ‘건방짐’으로 변모한 순간이다.
#2. 부산 버스에서 겪은 일이다. 버스 앞쪽에 서 있는데 누군가 내 엉덩이를 건드리는 느낌이 났다. 나는 주변을 살피다 내 뒤에 선 남자와 마주쳤다. 나는 그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그가 황급히 버스 뒤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순간 애먼 사람 오해한 건가 싶었다.
한 5분 쯤 지났을까 한 젊은 여자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기사 아저씨 여기 변태 있어요 차 좀 세워주세요.” 버스가 멈추고 시선은 여자에게 집중됐다. 여자는 어떤 남자를 보며 나한테서 떨어지라 말했다. 아까 나랑 눈이 마주쳤던 그 남자다. 그 남자는 “사람이 많아서 좀 닿은건데 뭐 그리 예민하게 구냐”며 아가씨를 윽박질렀다. 북적이는 버스도 아녔는데. 순간 아까 내가 느낀 구린 감촉이 총알처럼 머리를 스쳤다. 나는 그 쪽으로 가서 그 남자에게 말했다. 아저씨 아까 내 엉덩이 만졌잖아요. 내가 겪은 걸 말한 것뿐인데 가슴이 미친 듯 뛰고 두려웠다.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버스 기사 아저씨는 그에게 내리던지 경찰서에 가던지 선택하라 말했다. 그는 씩씩대며 버스에서 내렸다. 나는 아직도 그를 경찰서에 데려가지 않을걸 후회한다. 그가 받을 벌의 크기와 무관하게 남의 몸에 손대는 일이 ‘경찰서’에 갈 만한 사안이란 걸 알렸어야 했는데. 내 용기의 크기가 겪은 일을 발설하는 데 그친 것 같아 자괴감이 들었다.
#3. 알고 지내던 언니가 겪은 일이다. 지하철에서 웬 여자가 자기를 자꾸 쳐다보더란다. 언니는 ‘내 얼굴에 뭐 묻었나’ 생각했다. 문제의 여자는 어느 순간 언니에게 다가오더니 ‘저 사람 그쪽 촬영하고 있어요’라고 말하고 한 남자를 지목했다. 그 여자는 다음 역에서 황급히 내렸다.
언니는 순간 머리가 띵했지만 저 놈을 혼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언니는 남자를 따라 내렸다. 그리고 그를 잡고 말했다. 아저씨 저 촬영하셨죠. 남자는 아니라고 부정했다. 언니는 남자를 붙잡고 주변에 도움을 요청했다 경찰에 신고 좀 해달라고. 그러자 남자가 휴대폰을 바닥에 던졌다. 휴대폰은 박살이 났다. 박살난 휴대폰과 언니와 남자는 경찰서에 갔다.
경찰서에서 휴대폰 메모리를 복원해보니 가관이었다. 남자의 사진첩엔 일상에서 마주한 여성들의 사진과 영상이 무수히 저장 돼 있었다. 언니의 다리 사진을 포함해서.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는 언니에게 남자가 말했다. “아가씨가 너무 예뻐서 그래. 잘빠진 다리를 가지고 있는데 눈이 안가겠어? 예쁜 거 담고 싶은 건 본능이야”
남자에겐 벌금형이 내려졌다. 경찰 조사 중 둘 다 노원에 사는 게 밝혀졌는데 남자는 경찰서를 떠나는 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가씨, 우리 이웃끼리 사이좋게 지내자.”
타인의 신체를 공공재 취급하거나 동의없이 사유화 하는 현상에 문제의식을 가지는 게 뭐 그리도 어려운 일일까.
이 외에도 무수한 이야기들이 있다. 술 취한 남자가 얼마면 너랑 잘 수 있냐고 따라오고, 무시하고 제 갈 길 걸었다가 시X년이란 욕을 들었다. 잘 모르는 같은 과 여자애들 사진을 스스럼없이 공유하고 품평하는 선배의 카톡방을 목격했다. 나 역시 카톡방 성희롱의 피해자였다. 이 일로 발생한 우울감을 이겨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너무나도 흔하고 보편적인 일들이다. 타인의 신체를 공공재 취급하거나 동의없이 사유화 하는 현상에 문제의식을 가지는 게 뭐 그리도 어려운 일일까.
“이제 불안은 너희 몫이야”란 서늘한 여름밤님의 웹툰 대사가 심금을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