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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손 Mar 01. 2018

내가 ‘믿고 거르는’ 사람은

타인을 흡수하려는 이들에 대한 비판

그림: Ensor, Self-Portrait with Masks (1899)



태생부터 바보라 인연을 쉽게 끊지 않는 편이다.

상대방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스탠스가 대척점에 있더라도 사람은 내게 소중한 자원이다. 설령 상대방의 견해가 나를 불편하게 만들거나 빡치게 할지언정 그것만으로 섣불리 연을 끊겠다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분노했던 바로 그 지점이 상대방이 삶을 통틀어 구축해 온 자산일 수도 있단 연유에서다. 또한 다른 좋은 배울거리도 많고.

 '나라는 동일자로 흡수되지 않는 절대적인 타자가 있음을 드러내고, 그 타자에 대해 가지는 윤리적인 책임성이 나의 나됨, 즉 나의 주체성을 구성하는 근본임을 보인다'라는, 어느 토요일 아침 우연히 접한 글귀의 공이 컸던 것 같다. (참고로 이 글귀는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철학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등장한다.) 상대가 아닌 나를 위해, 나란 우주를 스스로 지켜가기 위한 방어 기제가 타인에 대한 존중이란 형태로 귀결되는 셈이다.

그럼에도 내가 먼저 연락을 끊어버린 이들이 있다. 아주 극소수지만 치가 떨릴 지경이다. 저마다 다른 곳에서 연을 맺었지만 공통점은 하나다. '상대방을 흡수하려든다'는 것. 항상 자신의 기분을 표하고 대화의 무드를 기분에 따라 맞추려했던 이들이었다. 끊임없이 가르치려든다. 쉽게 화내고 쉽게 사과한다. 자의식 과잉인걸까 아니면 자존감이 부족해서 타인을 주춧돌 삼아 위안받고 싶은 걸까. 원인을 알 턱이 없지만 그런 우주까지 지킬 여력이 없었다. 위태로워보이는 그들에겐 타자에 대한 배려의 흔적이 먼지만큼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태도의 문제다. 경제적, 정치적 견해차이 같은건 연을 맺는 데 문제될 거 없다. 다만 섣불리 상대를 계몽하려 하거나 자신의 기분을 주입하려하면 반감부터 든다. 설령 내가 그의 의견에 동의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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