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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손 Mar 10. 2018

예상 외로 까진 애

학교 밖 보살핌의 기억

2010년에 스페인 갈 비행기 값과 여행비를 벌기 위해 가까운 도넛가게에서 알바를 했었다. 그곳에 어린 여자아이가 하나 있었다. 당시 스물 두 살인 내 눈에도 앳되 보이는 아이였다. 아마 중학생 정도의 나이였을 거다. 내가 아이에 대해서 아는 정보는 극히 적었다. 학교를 다니지 않고 있으며 수수한 차림으로 보아 멋 부리는데 별로 관심 없다는 것. 난 그저 제빵을 배우고자 학교를 관두고 현장에 뛰어 든 아이겠지 생각했다.

내 판단 착오였다. 어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애는 소위 ‘까진 계집애’였다. 술 마시고 지각 하거나 아예 잠수타버리고 알바에 안 나오는 게 다반사였다. 나이가 두 배 가까이 많은 성인 남성과 교제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퇴근 후 남자친구의 오토바이 뒷 자석에 앉아 해운대 일대를 질주한다는 사실도. 나는 내심 ‘전혀 그렇게 안 생겼는데...’라고 생각하다 조용히 자기 검열을 했다. 그래 왕방울만한 써클렌즈 끼고 화장 진하게 하고 담배물고 있다고 까진 것도 아니고 그 반대라고 못 까질 것도 없지, 나는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했다.

아이의 연쇄 잠수가 이어지던 어느 날 오픈조였던 나는 홧김에 매니저 언니에게 물었다. 언니 ㅇㅇ이 요즘 왜 이래요? 걔가 말도 없이 일 안 나오고 그러니까 언니 일이 두 배로 늘었잖아요. 언니는 한숨으로 내 말에 동조했다. 나는 연이어 물었다. 근데 점장님이 걔 자르라고 안 그래요? 언니는 한숨을 거두며 말했다. “당연히 걔 요즘 어떻냐 물어보시지, 근데 내가 쉴드치고 있다. 걔 여기서도 내쳐지면 돌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 같아서.”

내 짜증으로 시작된 대화는 그 아이의 가정사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이혼한 아이의 부모는 각자 다른 사람과 살림을 차리고 자녀를 내버리다 시피했다. 아이는 나이 차가 좀 나는 언니와 둘이 살게 됐는데 언니도 아이를 방치했다. 홀로 남은 아이는 학교를 겉돌다 결국 관뒀다. 남자친구도 방황 중에 만났다고 한다. 언니 말을 빌리자면 조카뻘과 사귀는 건 못 미덥지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아이는 여러 일터를 전전하다가 그 도넛가게에 몸담게 됐다.

아이의 방황은 계속됐다. 관계맺기에 익숙하지 않았던 탓일까, 아이는 ‘지각’이나 ‘결근’을 알리지 않아 매니저 언니를 곤란하게 만들기 일쑤였다. 점장은 아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아이의 사정을 아는 언니는 아이의 결격사유보단 희미한 희망에 주목했다. 언니는 아이가 미안해하고 잘하려는 모습을 보일 때 마다 언 마음이 녹는다 말했다. 그래서 언니는 아이가 잠수 후 출근하면 따끔하게 혼내되 종일 옆에 붙어서 도넛 만드는 법을 알렸다. 아이가 약한 모습을 보일 때면 이거라도 배워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어르고 달랬다. 나는 누군가의 삶을 붙들어 매려 애쓰는 매니저 언니를 보며 부끄러움을 느꼈다. 내가 ‘예상 외로 까진 애’라고 생각했던 그 아이는 언니에겐 ‘예상 외의 길로 빠지지 않게 잡아둘 사람’이었다.

내게 그 일터는 스페인행을 위한 ‘선택’의 일환이었지만 누군가에겐 최후의 보루였다. 또한 그걸 알아챈 존재가 있었기에 도넛가게를 기점으로 아이에게 새로운 선택의 장이 열렸을지도 모른다. 아이의 가정사를 동정할 마음은 없다. 나 역시 정상가족 담론에 회의적이며 누군가의 성장기를 평가하는 건 오만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성장기에 응당 받아야 할 보살핌을 학교 대신 일터에서 받은 아이의 서사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매니저 언니의 세심함과 공감능력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알바를 관둔 후 언니와 아이의 소식은 모른다. 아이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져 이젠 하얀 얼굴과 그 얼굴을 덮은 솜털, 손댄 흔적이 없는 곱슬머리 같은 잔상만 떠오른다. 이젠 성인이 되었을 이름조차 기억 나지 않는 그 아이. 부디 예쁘게 둥지도 틀고 주변에 먼저 손 내밀 줄 아는 여유 있는 사람으로 자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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