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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손 Mar 14. 2018

쇼킹했던 짝사랑의 싱거운 결말

첫 짝사랑의 소중한 기억

요즘 지난 가요를 찾아 듣는다. 퇴행적 위로의 일환인지 뒤늦게 깨달은 한국어 가사의 아름다움 때문인지는 나도 모른다. 자주 듣는 곡은 삼순이 삽입곡이기도 했던 W의 쇼킹 핑크 로즈다. 세련된 멜로디와 상상의 문을 열어주는 가사가 무척 매혹적이다. 2000년대의 기적같은 곡이다.  

이 노래를 처음 접한 13년 전부터 지금까지 항상 한 가지 의문을 품어왔다. ‘쇼킹 핑크 로즈’가 뭘 은유 하는 걸까. 내 딴엔 ‘국지적으로는 여인의 빛나는  입술을 지칭하고 보다 넓게는 도발적인 언행을 일삼는 여인의 매력을 지칭하는 게 아닐까’ 결론 내렸다. 그냥 핑크 로즈라고 했으면 상대에 대한 찬미로 그쳤을 텐데 ‘쇼킹’을 덧붙인 덕에 사랑에 홀린 화자의 감정이 주제가 됐다. 단 하나의 수식이 노래 속 객체와 주체를 바꿔 버린 셈이다.

내게도 충격으로 시작된 사랑의 추억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방심한 사이 ‘훅’ 치고 들어오는 상대를 짝사랑 한 적이 있다. 때는 이 노래가 발매된 2005년, 고등학교 1학년 때다. 여고를 다녔던 나는 남고 아이들과 반팅이란 걸 했다. 당시 내 물건을 집은 아이와 둘이서 30분인가 1시간을 보내야하는 미션 같은 게 주어졌다. 내가 낸 립글로스를 고른 아이는 좀 귀여운 축에 속하는 아이였다. 나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그 아이와 부산대 일대를 거닐기 시작했다.

그 아이는 도발 일색이었다. 커플 미션이 부끄럽다고 커플이 되고도 다대다로 뭉치는 아이들이 대다수였는데 그 아이는 우리는 따로 놀자며 나를 밖으로 이끌었다. 1차 쇼크였다. 자리 잡은 아이스크림 가게에서도 도발은 계속됐다. 그 아이는 대뜸 전교 등수를 물었다. 자기는 상위권이란 부연 설명과 함께. 내 등수를 밝혔더니 ‘오 니도 공부 쫌 하네’란다. 이놈 대체 뭐지.

2차로 옮긴 롯데리아에서도 도발은 계속 됐다. 아이는 내 핸드폰을 빼앗더니 자기 번호를 찍었다. 다음과 같은 멘트와 함께. “지금 핸드폰 압수당해서 다음 주 수요일 이후에 문자 보내라”. (지금 생각하니 진짜 고딩스럽다) 요청하지도 않은 번호를 찍고 연락 달라는 아이의 당당함에 내 심장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쇼킹의 끝은 싸이월드 일촌명이었다. 고심해서 만든 일촌명으로 내가 먼저 아이에게 일촌 신청을 했는데 그 아이가 ‘이게 뭐냐 재미없다’며 자기가 다시 신청했다. 녀석이 만든 일촌명은 무려 ‘원빈’과 ‘채영이’(한채영ㅋㅋ)였다. 17년 내리 잔잔했던 호수에 파동이 일었다. 이성과의 밀고 당기기나 줄타기 따위 몰랐던 당시의 내게 녀석이 연신 훅을 날렸다. 나는 어쩔 방도가 없다는 듯 그 아이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그 아이에겐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 여자친구와 헤어지고도 나와 사귀지 않았다. 나중엔 내 친구와 사귀기도 했다. 난 그저 그 어장 속 물고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대학교 입학 후 친구의 주선으로 그 아이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 아이는 여전히 날 물고기 취급했다. 자존심 상한 나는 ‘재수 성공하라’며 덕담을 둔갑한 저주를 끝으로 아이와 헤어졌다. 다시는 볼 일 없을 줄 알았다.

운명의 장난일까, 한 4~5년이 지났을 때 그 아이를 다시 보게 됐다. 그것도 무려 서울 한복판에서. 철쭉이 흐드러지게 핀 늦봄 날이었다. 당시 타 대학교 학생과 사귀었던 나는 남자친구의 학교에서 산책 중이었다. 교정을 떠나 카페로 가고자 후문으로 향하는데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닌가. 녀석이다, 날 물고기 취급했던. 문득 풍문으로 들었던 그 아이의 근황이 떠올랐다. 재순가 삼수를 하고 그 학교에 입학했다는 이야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 17살에 큰 지각 변동을 일으킨 것에 대한 여진 같은 사건이라 생각했다. 나는 손잡고 있던 이에게 말했다. 저기 저 사람 내가 고등학생 때 좋아했던 사람이다. 당시 나의 남자친구는 ‘니가 아깝다’고 받아쳤다. 소심하고, 찌질하지만 내 딴엔 호쾌한 복수(?)였다. 나는 철쭉과 그 아이를 뒤로하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러 길을 건넜다. 쇼킹했던 첫인상 치곤 밍숭맹숭한 결말이다.

이젠 나를 물고기 취급했던 것에 대한 섭섭함 따위 남아있지 않다. 그 보다는 그 아이를 만나기 전에 느꼈던 설렘 같은 것만 떠오른다. 이를테면 몰래 메이크업 베이스를 바르고 써클렌즈를 끼기 위해 망 봐주던 친구들의 웅성거림이나 뻗친 머리를 달래줄 고데기와 교실의 온도차 같은 것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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