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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손 Mar 25. 2018

스몰 토크

우연한 대화에 대한 로망과 회의

친한 친구가 며칠 전 겪은 일이다. 대형 서점에서 책 구경하고 있는데 한 여자가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자신을 ‘꿈에 대한 동화를 쓰는 사람’이라고 소개한 낯선 여인은 친구에게 2-30대의 꿈에 관해 인터뷰 하고 싶다며 대화의 물꼬를 텄다. ‘꿈과 글’ 환상의 배합에 매료된 친구는 이방인에게 마음의 빗장을 풀 준비를 했다. 헌데 여인이 친구에게 서면 인터뷰와 카카오톡 만을 고집했다. 친구가 메일로는 안 되냐 물으니 낯선 이는 ‘나는 메일을 안 본다’고 철벽방어를 쳤다. 그제야 친구는 깨달았다. 그녀의 접근법이 도를 아십니까의 교보문고 버전이었음을. 역시 도한민국 다운 발상이다.

“나한테도 스몰토크의 기회가 주어진 줄 알고 순간 설렜지 뭐야”
한국에서도 이방인과 형이상학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기대감에 잠깐 부풀었던 친구는 곧 시무룩해졌다. 도로 시작된 우리의 대화는 곧 스몰토크 품귀 현상으로 집중됐다. 그러게 왜 우리나라에선 스몰토크가 피어나기 힘든 걸까.

짧은 기간 살았지만 스페인과 뉴질랜드에선 스몰토크가 일상이었다. 내 빨간 가방이 맘에 든다고 엄지 척 들던 금발 초딩, 자기 회사가 두산 협력사라던 마드리드 아저씨, 2주 뒤에 대한항공을 타고 멀리 떠날 예정이라던 런던 신사 등등. 모두 길에서 우연히 마주한 사람들이다. 수년 간 유니폼처럼 신었던 닥터 마틴도 런던에서 익명의 남자가 골라준 거다. 두 개를 두고 거울 앞에서 고민하는 날 보고 ‘이게 더 예쁘다’며 누군가 골라줬었다. 서사가 더해진 재화는 기념품이 되는 법. 나는 그 신발을 2011년 한 해의 추억처럼 여겼다.

헌데 한국에서의 스몰토크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떠올라도 상대는 대부분 외국인과 노인들이다. 관광지인 혜화에 살다보니 외국인들에게 길 안내할 일이 많았다. (벽화 근처에 살 땐 사진도 몇 장 찍어줬다-,.-) 노인들과의 대화도 대부분 ‘도움’을 전제로 한 것들이었다. 짐 들어 드리는데 ‘아이고 계란이 많아서 무겁지’라던가 내가 의정부에 가야하는데 어느 방향으로 지하철을 타야하나, 아이고 아가씨 친절하네 등등. 이런 나도 젊은 이방인이 말을 걸면 극도로 경계한다. 태생적인 건 아니고 누적된 피로감 때문이다. 번화가에서 20m 간격으로 도쟁이와 마주쳐 길바닥이 무슨 던젼 같다고 투덜댄 적도 있다.

스몰토크에 대한 은밀한 로망은 비단 나만의 것은 아닌 것 같다. 커뮤니티 가면 별 것 아닌 일에 서로 재잘대는 군상을 어렵잖게 볼 수 있으니까. 그럼에도 낯선 이와 나누는 우연한 대화는 통신망을 경유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물리적 접근은 아직 요원하고. 이 수요와 실행의 격차가 왜 유독 이 땅에서 큰 것인지는 나도 못 밝히겠다. 모든 게 도쟁이 때문일까. 글쎄다. 막상 낯선 동년배에게 공통분모 없이 말 건다고 상상하니 좀 부끄러울 것 같기도 하다. 저 인간이 날 해치려 말거나 싶은 경계심도 무시 못 할테고. 스몰토크를 바라면서도 길에서 누가 내게 말 걸면 결국 냉대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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