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은손 Aug 09. 2019

나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첫 아파트 이사의 기억

피하고 싶은 질문이 있었다. “은혜 너는 몇 동에 사니?”


세상물정을 모르는 나이였지만 이 질문이 경제수준의 가늠자임을 본능적으로 알았나보다. 만약 우리 집보다 잘 사는 것 같은 친구네 부모님이 이런 질문을 하면 솔직하게 답하되 항상 첨언을 했다. 우리아빠는 사장님이에요. (영세업자지만 표면상 사장은 사장이니까). 나는 ‘우와 은혜 아버지 대단하네’란 말을 도출 해낼 때까지 떡밥을 던졌다. 원하는 말을 들어야 직성이 풀렸다. 8~9살 어린 아이가 자존감을 지키는 방법은 이처럼 얄팍했다.

초등학교 1학년, 난생 처음 아파트단지에 이사를 갔다. 지금은 부산의 명소가 됐지만 내가 처음 중앙하이츠에 이사했을 때 온천천은 그냥 역한 냄새를 풀풀 풍기는 지방 하천이었다. 냄새나는 하천 옆 허허벌판에 뜬금없이 자리한 아파트에서 ‘평수’는 일종의 계급이었다. 25평대는 평민, 32평대는 귀족. 내가 살던 아파트를 기점으로 새로운 아파트가 생겨나며 아파트 브랜드와 평수, 부모님 직업 등 계급을 구성하는 요소가 더욱 복잡해졌다. 온천천이 재정비되며 생활 반경이 덜 개발된 옆 동네까지 확장되자 나의 양가적 감정은 더욱 심화됐다. 우리집이 이 동네에서 평타는 친다는 안도감과 나보다 더 잘 살거나 못사는 친구들과 어울릴 때의 위화감이 뒤섞였다. 당시 세상의 다이내믹스를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다이내믹스가 빚어낸 그림자는 느끼고 인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학생이 되고 다른 동네로 이사하면서 이 레퍼토리도 진화했다. 살림살이, 부모의 재력 전쟁이 아이들 간 성적경쟁으로 확장된 것이다. 비교적 상위권이었던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들은 학부모회를 통해 자연스레 친해졌다. 서로 견제하면서도 좋은 학원, 과외선생님 등의 정보를 공유하는 일종의 ‘우호적 경쟁자’ 같은 관계가 형성됐다. 당시의 나는 이 관계로부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 같다. 모든 시계를 중간, 기말고사에 맞추되 시험만 치르면 만화책을 산더미 째로 빌려오고 노래방에서 한 맺힌듯 노래를 불러댔으니까. 그 친구들과 노는 게 너무 즐거웠지만 시험에서 만큼은 지고 싶지 않았다.

오늘 친구와 이야기하다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나처럼 타향살이하는 친구가 ‘고향 친구들이 여전히 경제력 경쟁(+견제)을 해서 불편할 때가 있다’고 말한 게 시발점이었다. 이를테면 진짜 부자와 가짜 부자를 가려낸다거나 주거형태를 판단기준 삼는 언행들 말이다. 신이 난 나는 친구에게 쫑알쫑알 내 경험담을 풀어댔다. 내 이야기를 찬찬히 듣던 친구가 말했다. 그래도 자기는 이해할 수 있다고, 사고방식은 다르지만 그들을 존중해야 한다고. 친구는 덧붙여 말했다. 그들에게도 다른 가치를 모색할 기회가 주어졌다면 주거형태나 자녀로만 경쟁할 일은 적었을 거다. 지금 당장 그들이 소유한 것이나 그들의 자녀 상태가 그들에겐 세상의 전부일 수도 있다.

그러게 말이다. 그동안 맘충 얘기만 나오면 ‘여성에게 육아 부담을 전가하는 구조는 안보고 애꿎은 엄마들만 욕한다’며 부들부들 떨었으면서 왜 이 부분에선 피해자 코스프레를 했을까. ‘우리엄마는 너무 과해, 엄마랑 어울리는 아줌마들도 극성이야’라고 투덜대며 엄마와 주변 인물들을 가해자로 낙인찍으려고만 했을까. 소유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흉보면서 ‘나는 고귀하다’는 식의 정신승리를 하려했던 것일까. 에리히 프롬이 제시한 두 기준, ‘소유양식’보단 ‘존재양식’을 추구하는 게 더 있어 보인다 생각했던 탓일까. 정작 나도 소유양식으로 대변되는 요소들(이를테면 사회적 지위, 지식 등)을 놓지 못하고 있으면서.

‘마음이 확고하게 도덕 위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이립의 나이지만 아직도 반성하고 깨달을 게 많은 걸 보니 내면은 아직 서른에 못 미친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무선 마우스 왜 안 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