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은손 Aug 15. 2019

잉여 소통

목적없는 대화의 가치

우리 집 바로 앞 편의점 알바생은 모두 중국인 유학생들이다. 밤늦게 편의점에 가면 그들은 한국어 단어를 외우거나 중국어로 화상통화를 하고 있다.

이제 어느 시간대에 누가 있는지 대충 안다. 평일 저녁 시간대엔 마르고 안경 낀 친구가 있다. 주말 오후는 눈썹이 짙고 한국어 단어를 열심히 외우는 아이 담당이다. 안경 낀 친구는 오래 일해서 실수하는 일이 적다. 눈썹이 짙은 아이는 가끔 점보 닭다리와 순살 치킨을 혼동하는 사소한 실수를 저지른다. 내가 만약 스페인의 구멍가게에서 일했더라면 범했을(식초 맛 감자칩과 싸워맛 감자칩을 혼동하는 류의) 귀여운 실수다. ‘미안해요~’라며 진한 눈썹을 찡그리며 짓는 겸연쩍은 표정은 ‘괜찮아요~’라는 답을 자동으로 자아내는 주문 같다. 이 친구들과 정 들었나보다.

오늘 영혼의 간식 치킨팝을 사러 편의점엘 들렀다. 과자코너를 어슬렁거리는데 갈색 모자를 쓴 멋쟁이 할아버지가 안경 낀 친구에게 중국어로 말을 걸어왔다.

- 뭐라뭐라 불라불라. 이거 맞아?
아니에요. 뭐리뭐리 물라물라 이거에요.
- 뭐리뭐리 물라물라라고? 뭐리뭐리 물라물라. 정확하지?
네 맞아요.

할아버지는 배운 중국어를 안경 낀 친구를 상대로 써먹고 있었다. 안경친구도 즐거웠는지 할아버지의 성조나 틀린 발음을 일일이 교정해줬다. 나는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치킨팝이 어디 있는지 뻔히 알고도(내가 몇 번을 사먹었는데) 과자 가판대를 괜히 한 바퀴 더 돌았다.

계산대에 가는데 할아버지가 알바에게 물었다. 너 밥은 먹었냐고. 그 친구는 아직 안 먹었다며 배가 고프다고 답했다. 할아버지는 조리 음식이 진열된 곳 앞에서 왕새우 튀김을 가리키며 이거 아주 맛있다고, 꼭 먹어보라고 권했다. 안경 친구는 웃으며 꼭 먹어보겠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밥 먹었냐는 안부인사가 왜 그리 따뜻하고도 아픈지 모르겠다. 나는 1년 6개월간 많게는 하루에 세 번도 그 편의점을 들락날락하고도 ‘감사합니다’, ‘괜찮아요’ 외의 말을 건넨 적이 없는데. 그 할아버지는 중국어 실력을 뽐낼 상대를 찾아서 뿌듯했겠지.

도시는 늘 붐비고 SNS에선 텍스트와 이미지가 범람하지만 정작 누군가를 대면했을 때 효용 없는 대화는 가치를 잃기 일쑤였다. 그나마 친구들과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며 속을 털어놓지만 그 범주 밖의 사람과 스몰토크를 이어가는 건 가끔 사치로 느껴졌다. 할아버지와 안경 친구의 짧은 대화를 훔쳐보며 잉여 대화도 때때로 필요하단 생각을 한다. 앞으로 편의점에서 그 할아버지와 자주 마주쳤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F 코드의 장벽을 넘고 말 테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