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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손 Aug 23. 2019

여자의 사회적 수명과 남자 와인설

미즈박을 회고하며

https://m.youtube.com/watch?v=ghHE_kVWXxM&feature=youtu.be


교실에서 둔탁한 마찰음이 터져 나올 때면 어김없이 그녀가 등장했다. 판치기를 병적으로 싫어했던 그녀. 몇 백 원 거머쥔 승자의 기쁨은 그녀의 회초리 앞에선 3초짜리 감정에 불과했다. 다른 선생님들은 기억도 잘 안 나는데 이상하게 미즈박에 대한 기억은 선명하다. 딱히 끈끈한 유대감을 공유한 것도 아니었는데.

미즈 박은 중학교 때 영어 선생님이었다. 꽤 장신이었는데 묘하게 신체가 구부러져 있었다. 목소리는 물먹은 하이톤이었다. 화날 때랑 웃을 때를 짐작할 수 없는 다이너마이트 같은 사람이었다. 미즈박의 예측불가능성은 아이들에게 꽤 많은 웃음을 선사했다. 정작 본인은 진지한 순간까지도.

미즈박은 내게 ‘여자 수명설’을 전파한 최초의 어른이기도 하다. 어느 날 미즈박의 차를 타고 밖에 나간 적이 있었는데 갑자기 미즈박이 그런 말을 꺼냈다. 남자는 나이를 먹을수록 멋이 깃드는데 여자는 나이를 먹을수록 볼품없고 초라해진다고. 나도 마찬가지라고. 지금이야 ‘이건 뭐 남자는 와인이다 급의 dog소리냐’ 반박하겠지만 당시 14~15살의 나는 그 말에 어떤 대꾸도 할 수 없었다. 한참 어른의 말이기도 했고 미즈박의 고뇌(?)를 이해할 혜안까지 갖추지 못한 탓이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욕심 많은 중딩이었던 나는 어른이 되면 4개 국어쯤은 거뜬히 하고 세계를 누비는 지도자가 될 거라 믿었다. 꿈에 부푼 중딩에게 너도 내 나이가 되면 초라해질거라고 예고하는 어른의 말이 어찌 고깝게 들렸겠는가. 야망에 부푼 내 풍선에 감히 바늘을 대려는 미즈박의 언사가 못마땅했다. 그 순간 백미러에 미친 미즈박의 얼굴이 초라해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 시간에 시스터 액트의 I will follow him을 재생하고 있었는데, 노래가 신나지는 구간(알럽힘~알럽힘~ 부분)에서 갑자기 미즈박이 회초리를 들고 춤을 췄다. 진지하게 노래를 듣다가 갑자기 춤을 추는 미즈박의 도발이 당황스럽고 한편 귀여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미즈박은 이제 교단에서 내려왔을거다. 손녀나 손주가 있을 수도 있겠다. 미즈박은 아직도 판치기를 병적으로 싫어할까. I will follow him을 들으면 흥을 주체하지 못할까. 자녀들에게 남자 와인설을 전파하고 다닐까. 라가르드나 메르켈도 볼품없고 초라하다고 생각할까. 아마 ‘세상을 이끄는 여성 지도자들’같은 콘텐츠가 굳이 나오지 않는 그날까지 남자 와인설을 꿋꿋하게 전파하지 않을까.

지금 I will follow him이 흘러나오던 그 순간을 함께 공유할 수 있다면 선생님은 하나도 초라하지 않다고, 아직도 흥에 몸을 맡길 줄 아는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그리고 14살 때보다 꿈의 크기는 작아졌지만 아직까지도 미즈박의 말에 동의할 수 없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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