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가지 질문 프로젝트 1주 차
여는 말: 최근 친구의 제안으로 ‘101가지 질문’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하루에 질문 하나씩 답하며 101개의 질문에 대한 답을 채우는 여정이다. 친구와 나를 포함한 10명의 여성이 모였다. 같은 질문에 저마다 다른 관점으로 답을 풀어나가는 과정이 재밌다. 앞으로 지난 한 주간 나의 답변을 모아 하나의 글로 발행하려고 한다. 단체 콘텐츠는 별도의 매거진을 파서 발행할 예정이다. 대부분 휴대폰으로 작성해서 띄어쓰기나 맞춤법이 틀린 부분은 양해 바란다.
101-1. 나는 오늘 죽어가고 있는가, 살아가고 있는가
달리기에 재주가 없지만 횡단보도 위에서 우샤인볼트가 된다. 초록 칸이 줄어들수록 속도는 빨라진다. 도로에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연출할 때마다 나는 죽어간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죽음이라는 필연을 1초라도 유예하려 애쓰는 형국이니까.
보험에 가입하고 사고 확률을 줄이고 운동을 하는 그 모든 세상사가 데스 리스크를 줄이려는 활동이 아닌가 싶다. '어차피 죽을 거 이 꼴로는 안돼'. '어차피 죽는 거 지금은 아니다'란 대전제 없이는 이뤄질 수 없는 일이니까.
진부한 말이지만 죽음을 유예하려 열심히 산다. 배고픈 소크라테스 대신 배부른 돼지로 죽고 싶어 좋은 음식을 먹고 장례식장의 풍경을 생각해 관계를 맺는다. 사후 누군가 부고기사를 써 준다고 가정했을 때 재미없는 약력으로만 채워지는 건 싫어서 곳곳에 흔적을 남긴다.
마침 오늘 한국 재계의 거부가 세상을 떠났다. 미디어에 그에 대한 평가와 부고기사가 넘쳐난다. 그 역시 초호화 차량 안에서 사고가 날까 두려워했던 때가 있었을 거다. 생명유지 장치로 꽤 오랜 기간을 버텼던 점을 고려하면. 죽음을 유예하고 싶은 욕구는 나 같은 서민이나 거부에게나 동일하다. 자본주의라는 메커니즘을 가뿐히 비웃는 인간의 필연은 냉혹하리 만큼 공평하다.
살아있는 한 최대한 죽음을 피하자는 선언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평등한 명령일지도 모른다. 나는 내일도, 모레도 횡단보도에서 줄행랑을 치고 탄 고기는 먹지 않을 요량이다. 식당에서 밥만 먹어도 대대로 보도되는 이 씨 일가처럼 대단한 인간은 아니지만 미시적이고 사소한 나의 역사는 아직 너무 짧다.
101-2. 어떤 집을 갖고 싶은가
요가매트에 누워 팔을 뻗어도 손에 닿는 가구가 없을 만큼 공간이 넉넉한 집이면 좋겠다. 땀에 찌든 요가매트를 깐 자리에 이불을 펼쳐서 잠을 청하고 싶지 않다.
커다란 서재와 생계와 직결되지 않은 장식장을 배치해도 버겁지 않은 크기의 집이면 좋겠다. 이사할 때 여행의 기억이 응축된 기념품이나 지적 허영심으로 구매한 책을 눈물을 머금으며 처분하는 패턴과 작별하고 싶다. 지난 흔적을 비자발적으로 청산해야 하는 삶에 진절머리가 난다.
이왕이면 부엌은 사교적이었으면 좋겠다. 한두 끼를 겨우 수용하는 작은 싱크대가 안쓰러워 대화 중에 설거지하러 갈 필요가 없었으면 한다. 더 많은 사람을 초대해도, 메뉴 욕심을 내다 접시가 쌓여도 마음 편히 홈파티에 집중할 수 있는 싱크대를 갖추고 싶다.
물리적 협소함에서 비롯된 불편함은 자유로운 행동과 사고를 제한한다. 공기의 감촉을 느끼며 운동하고 오랜 책을 서재에서 발견하곤 상념에 빠지는 사치를 허용하는 집을 꿈꾼다. 즐거운 식사의 흔적을 서둘러 치우지 않아도 괜찮은 집이 우리 집이었으면 좋겠다.
101-3. 마라톤을 완주했는가
'ㅇㅇ일보 거북이 마라톤'. 내가 처음 참가해본 마라톤 대회는 마라톤의 탈을 쓴 걷기 행사였다. 함께 언론고시를 준비했던 당시의 연인은 주최사의 최종면접을 앞두고 있었다. 그 간절한 마음을 알기에 함께했다.
남산 자락길을 한 바퀴 도는 게 코스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여유롭게 결승선에 도달했다. 당시 야당의 대표였던 현 대통령도 이 행사에 참가했고, 그 앞에서 투정(?) 부린 끝에 기념사진도 촬영했다. 높은 하늘만큼 합격에 대한 기대감도 증폭되는, 여러모로 즐거운 행사였다.
애석하게도 거북이 마라톤 이후의 삶은 짠내 일색이었다. 탈락 통보를 받은 전 연인은 그날 쓰디쓴 고배보다는 덜 쓴 알코올을 부어댔다. 거북이 마라톤의 저주인지 2년 후 나도 그 회사의 면접 전형에서 미끄러졌다. 그곳에서 인턴을 하며 전형을 진행했던 터라 충격과 배신감이 컸다. 한동안 거북이 등 껍데기 비슷한 것만 봐도 박살내고 싶었다.
현재 전 연인은 언론고시라는 마라톤을 완주했고 나는 그러지 못했다. 결승선에 닿을 듯 말듯한 레이스에 지쳐 제 풀에 떨어져 나간 것이다. 지금은 새로운 마라톤 행사의 출발선을 막 벗어난 상태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참여 중인 마라톤은 '거북이 마라톤'과 유사한 형태다.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고 주변 사람에게 스몰토크를 걸어도 초조하지 않은 그런 경주. 목표 달성을 위해 기록에 천착해야 하는 이전의 마라톤과는 상반된다.
나는 마라톤을 완주하지 못했다. 아니 이 마라톤에 결승선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치면 주저앉아도 되고 화장실 걱정 없이 물을 벌컥벌컥 마셔도 괜찮은 자비로운 마라톤. 어느 날 갑자기 결승선이 지정될지도 모르겠지만 그전까지는 한없이 목표 없는 레이스를 즐길 생각이다.
101-4. 천직을 찾았는가
내 천직은 먹보다. 먹는 일에 사족을 못 쓴다. 자의식이 용암처럼 샘솟던 사춘기 시절, 온 우주의 기를 모아 내 존재가치를 고민하는 심각한 순간조차 지렁이 젤리를 입에 물고 있었다. 이별과 최종 탈락의 비극이 도미노처럼 쏟아지는 때엔 손을 덜덜 떨며 귤을 깠다.
'천직'이라는 거창한 명칭에 걸맞게 본분에도 충실했다. 먹거리 사진으로 SNS를 도배했고 고수를 못 먹는 남자와는 썸조차 타지 않았다. '주말에 뭐했어요?' 대신 '주말에 뭐 먹었어요?'란 질문을 받도록 주변 사람들을 길들였다. 기회가 닿는 선에서 섭취의 축복을 원 없이 누렸다.
내게 식(食) 행위는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자기 발견 도구다. 식탁 위에서 오간 대화를 토대로 관계를 점검하고 '한 끼'의 상태를 기반으로 근래 내 상태를 진단한다. 예컨대, 타인과의 식사 시간이 즐겁지 않으면 그 사람을 다시 만날 확률이 줄어든다. 식사 중 배달음식의 비중이 크면 현재 마음의 여유가 부족한 상태라는 뜻이다. 식사를 그저 목구멍이 바쁜 시간으로만 여겼다면 크나큰 오산이다.
물론 회사라는 조직에서 수행하는 일도 사랑하지만, 천직으로 여길 수준은 아니다. 이 일은 가끔씩 나를 불안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거나 열등감에 빠뜨리곤 한다. 하지만 먹는 일을 관두고 싶다거나 먹는 데 자신감이 없던 적은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 먹보가 내 천직이라고 천명하는 이유다.
천직, 소명 따위의 단어는 쓸데없이 무게를 잡아 가끔 우리를 초라하게 만든다. 애써 찾은 일이 천직이 아닌 것 같으면 지난 시간을 반추하며 행복 회로를 돌려야 간신히 마음이 놓인다. 직업이 천직인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과 비교해봤자 내 손해다. 그래서 나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용쓰지 않아도 잘하는 그런 행위.
말의 무게에 굴복하느냐, 그 무게를 축소하느냐는 선택의 영역이다. 후자를 고른 나는 먹보로서의 여정에 충실할 계획이다. 섭취물에 따라 달라지는 몸의 형태와 테이블 위의 담론을 치열하게 탐구하며 천직에 이 한 몸 불사르겠다.
101-5. 막차를 쫓아가듯 열정을 쫓아간 적 있는가
학창 시절 소위 '모범생'이었다. 부모님 눈 밖에 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수학여행을 제하곤 술을 마시자던 친구들의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옆 학교 남학생과 첫 데이트 하던 날에도 부모님께 그 사실을 알려 부채의식을 덜었다. 당시의 나는 스스로 통제하며 부모님의 기대 안에서 행동하는 내 모습이 좋았다.
자발적 구속의 기제는 대학입시에 성공해서 상경만 하면 이 모든 통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목표 의식이었다. 남산타워 아래 쭉 깔린 도심은 기회의 표상이었고 야경을 반사하는 한강은 탄탄대로만 기다리는 미래의 청사진이었다. 평생 가까이했던 해운대의 풍경 따위 지긋지긋하기 짝이 없었다.
덕분에 고등학교 3년 내내 지각 한 번 하지 않았다. 체벌로 아침 자율학습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고2 때까지 수학 50점을 넘긴 적 없는 수포자였지만 서울권 대학을 가야 한다는 집념 하나로 고3으로 올라가던 겨울방학 때 미친 듯 수학 공부를 했다. 이후 수리영역은 무조건 2등급 이상 받았다. 대박과 쪽박 딱 중간의 수능성적을 받아 마지노선으로 설정한 대학 입학에 성공, 간신히 상경의 꿈을 이뤘다.
희한하게 수능 이후부터 부지런하던 모습이 증발해버렸다. 체체파리에 물린 듯 잠을 청했다. 엄마는 입시 준비에 지쳐서 그랬나 보다 하고 안쓰러워했지만 애석하게도 지금까지도 체체파리에게 휘둘리며 산다. 일 없는 날이면 미친 듯 잠만 잔다. 나는 잠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착한 딸일 때 가장 열정적이었다. 모든 감시와 통제로부터 풀려난 후 되는대로 살았다. 그때의 에너지를 소환하고 싶어 용쓴 적도 있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스스로 설정한 목표를 위해 전속력으로 달린 사람들이 존경스러울 정도로.
그렇다고 착한 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다. 아직도 가끔 고등학생으로 돌아가 지각 위기에 놓여 가슴 졸이는 꿈을 꾼다. 꿈에서 수능 고사장에 들어선 적도 있다. 목표 달성을 위해 불안을 꾹꾹 누르며 살았던 결과는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 무의식적으로 발현된다.
열정은 일종의 기회비용이다. 열정을 좇는 건 낭만적이고 멋진 일이지만 특정 부분의 희생을 수반한다. 지금의 나는 열정을 잃었지만 나를 불안하게 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인지하고 산다. 비록 착한 딸에서 나태한 딸로 다운그레이드 됐지만 나태한 딸은 자기 내면을 지킬 줄 아는 30대로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