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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손 Dec 03. 2020

12. 여전히 비를 좋아하는가

환상을 유지하는 게 이토록 어려운 일이다

여는 말: 최근 친구의 제안으로 ‘101가지 질문’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질문 하나씩 답하며 101개의 질문에 대한 답을 채우는 여정입니다. 친구와 저를 포함한 10명의 여성이 모였습니다. 같은 질문에 저마다 다른 관점으로 답을 풀어나가는 과정이 재밌습니다.

한 질문에 대한 모든 답변을 공유할 수 없어, 논의를 거친 후 질문 당 하나의 답변을 매거진에 정리합니다. 매거진에 공개되지 않은 답변 중에서도 매력적인 글들이 많은데 모두 공유할 수 없어 안타깝네요. 모든 답변을 읽을 수 있는 건 프로젝트 참가자만의 특혜겠죠? 낄낄. 


태양을 부지런히 피하던 시절의 가수 비.  비장하면서도 풋풋하다. © MBC, 인터넷


크랙 데이비드와 스팅의 메가 히트곡을 연상케 하는 곡 <태양을 피하는 방법>. 보잉 선글라스를 끼고 매끄러운 춤사위와 씁쓸한 보컬을 요란스럽지 않게 소화하는 가수 비의 퍼포먼스는 사춘기 소녀의 심장을 때렸다.


썸남과 구남친을 오가던 그의 음악은 <it's raining>을 만나 자의식 분출에 가닿았다. 비둘기색 교복을 입고 만화방을 찾은 소녀는 브라운관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외설적인 몸짓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덕질에 입문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르몬이 분출하던 시절 접한 그의 무대는 성적 이끌림으로 가득했다. 맨 몸에 조끼를 걸치고 왕벨트를 차야 패셔니스타로 추앙받던 시절, 비는 10대 소녀에게 '성인 남자'의 표상이었다. 대학가면 저렇게 농염하고 여유로운 남자들이 넘실대겠지. 


널 붙잡을 노래로 작은 손의 심장을 붙잡은 전성기 시절의 비와 비, 김태희 부부의 다정한 모습 © 엠넷, 중앙일보


착각이었다. 찌질한 이성들의 틈바구니에서 가장 후달리는 이와 연애했다가 뻥 차이는 일을 경험하며 멋진 남자에 대한 환상따위 와르르 무너졌다. 입에 담기 수치스러울 정도로 지질한 연애사가 반복되면서 섹시한 퍼포먼스를 펼치던 비와 자연스레 멀어졌다. 그가 대한민국 최고의 미인과 결혼했다는 소식은 대기업 총수의 자녀들이 재산권 분쟁에 돌입했다는 뉴스만큼 아득한 일이 됐다.


비교적 최근 '1일 1깡', '깡밍아웃'이라는 인터넷 문화를 따라 그와 재회했다. 오랜만에 접한 그의 무대는 내 지난 연애사만큼이나 민망했다. 환상의 남자는 온데간데 사라졌고 환장할 가사가 내 귀를 때렸다. 온 국민의 길티플레저로 등극한 꼬만춤을 보며 인생의 덧없음을 느꼈다. 환상이 깨지는 순간 대한민국 최고 미인의 남편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여러모로 1일 1깡중인 글쓴이 © 본인

신비로운 스타가 몇 년 뒤 망가진 모습으로 대중에게 관심을 사는 서사가 이제 대중문화의 치트키로 자리 잡았나보다. 내 말초신경을 자극하던 환상의 남자조차 이 수법에 의존하며 위태롭던 존재감을 위로 받고 있으니. 이젠 화려한 조명이 그를 비춰도 어떠한 동요도 느끼지 못한다. 내가 소화할 수 있는 자의식의 마지노선이 <it's raining>까지였나 보다. 판타지를 유지하는 게 이토록 어려운 일이다. 


저는 가수 비를 싫어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에 대한 환상이 무너져 내렸을 뿐이죠. 현재 자신의 이미지가 대중에게 어떻게 소비하고 있는지를 빨리 캐치해 유머 코드로 소화하는 그의 맷집은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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