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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손 Dec 03. 2020

13. 어떤 춤을 배웠는가

플라멩코가 내게 선물한 것들

여는 말: 최근 친구의 제안으로 ‘101가지 질문’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질문 하나씩 답하며 101개의 질문에 대한 답을 채우는 여정입니다. 친구와 저를 포함한 10명의 여성이 모였습니다. 같은 질문에 저마다 다른 관점으로 답을 풀어나가는 과정이 재밌습니다.

한 질문에 대한 모든 답변을 공유할 수 없어, 논의를 거친 후 질문 당 하나의 답변을 매거진에 정리합니다. 매거진에 공개되지 않은 답변 중에서도 매력적인 글들이 많은데 모두 공유할 수 없어 안타깝네요. 모든 답변을 읽을 수 있는 건 프로젝트 참가자만의 특혜겠죠? 낄낄.



전주만 들어도 무조건 반사처럼 몸이 반응하는 노래가 있다.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스페인에서 자란 음악가 David Broza의 Me voy(나 떠나요)란 곡이다. 지금은 사라진 학교의 노천극장에서 이 스페니시풍의 노래를 무한 반복하며 하루 종일 춤을 췄다. 공강 시간, 연휴 따질 것 없이 모여서 춤을 췄다.


대학에 입학해 가장 먼저 배운 건 스페인어가 아닌 스페인 전통춤 플라멩코였다. 머리에 큰 꽃을 달고 빨간 치맛자락을 휘날리는 고고한 집시여인처럼 보이길 바라며 시작한 일이었다.


무…무려 12년전 사진이다. 세월이여 ©작은손


그러나 플라멩코의 붉은 화려함 이면에 치열함이 가려져있었다. 무희들의 화려한 손짓을 따라하고 싶었지만 처음 한 달간 스텝 밟는 법부터 익혀야했다. 플라멩코 댄서들의 펄럭이는 치맛자락 안에서 보이지 않는 다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단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흔한 교훈을 춤으로 배운 것이다.


플라멩코는 조직생활을 알려주는 지침서이기도 했다. 동아리원들끼리 무대 센터자리를 민주적으로 공유했고 낙오되는 이 하나 없도록 서로를 배려하며 춤 대열을 짰다. 남자 파트너와는 신체적 차이를 인정하며 호흡을 맞춰나갔다. 돋보이고 싶어서, 무대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서 들어간 플라멩코 동아리였지만 오히려 끈끈한 동료애를 얻었다.


무대가 끝난 뒤, 우레 같은 박수소리에 맞춰 뛰던 심장박동이 아직도 생생하다. 길어야 7분 남짓한 플라멩코 무대야말로 삶의 압축판이 아닐까. 보이지 않은 발들이 무대를 누비고 조직원들의 유대감이 대열을 유지했듯 이름 없는 노력과 공동체의 피와 땀이 삶의 찬란한 순간을 장식하는 일등공신이니 말이다. Viva la Vida! (인생만세). 내가 배운 플라멩코는 화려한 안무에 그치지 않는, 좋은 삶을 지향하는 그런 몸짓이었다.


한때는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했던 동아리 친구들, 다들 잘 사니? 성투하고 있니? ©작은손

논지에 맞지 않아 모든 것을 본문에 담지 않았지만 플라멩코는 여행지에서의 잊을 수 없는 추억도 안겨줬습니다. 스페인 교환학생 시절 세비야로 여행을 떠났는데요, 거기서 만난 집시들과 어울려 플라멩코를 췄거든요. 아리랑이 더 어울리는 체형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세상을 떠돌던 집시처럼 춤사위에 몸을 맡겼습니다. 안달루시아의 따뜻한 기후와 집시들의 여유로운 미소, 농염한 춤의 무대가 되어준 작은 동굴이 어우러진 늦봄의 밤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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