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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손 Dec 05. 2020

15. 나를 처음 알아본 사람은 누구인가

빅데이터 바다에서 은인찾기

여는 말: 최근 친구의 제안으로 ‘101가지 질문’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질문 하나씩 답하며 101개의 질문에 대한 답을 채우는 여정입니다. 친구와 저를 포함한 10명의 여성이 모였습니다. 같은 질문에 저마다 다른 관점으로 답을 풀어나가는 과정이 재밌습니다.

한 질문에 대한 모든 답변을 공유할 수 없어, 논의를 거친 후 질문 당 하나의 답변을 매거진에 정리합니다. 매거진에 공개되지 않은 답변 중에서도 매력적인 글들이 많은데 모두 공유할 수 없어 안타깝네요. 모든 답변을 읽을 수 있는 건 프로젝트 참가자만의 특혜겠죠? 낄낄.


아직도 가끔 교육청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당신의 이름을 검색합니다. 크로플을 유행시킨 어여쁜 연예인과 같은 이름이라 그런 걸까요, 당신의 이름을 구글링해도 낯선 정보만이 펼쳐지더군요. 초연결사회라지만 빅데이터도 세월은 못 이기나 봐요.


당신이 필자를 밝히지 않고 친구들 앞에서 내 일기를 읽어줬던 그날, 저는 화끈거리는 고개를 숙이고 광대가 해처럼 솟아오르는 걸 겨우 감췄어요.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죠. 그날 확인을 끝낸 일기장을 돌려받고 당신이 낭독한 그 글이 나의 일기였다는 거러 다시 한번 확인했어요. 부끄러워서 ‘참 잘했어요’ 도장이 찍힌 후 다시는 읽지 않았던 일기를 여러 번이나 다시 읽어봤어요.


하늘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25층에 살았던 나는 늦게 귀가하던 언니와 부모님을 기다릴 때면 음악을 틀어 놓고 하염없이 하늘의 변화를 지켜봤어요. 12세 소녀는 구름의 이동과 하늘빛에 미래를 투영해, 그 막연함에 주저하면서도 그것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어요. 그 날의 감상을 담은 내 일기가 당신의 어떤 곳을 건드렸나 봐요. 당신은 ‘나를 놀라게 한 일기가 있었다’며 친구들에게 제 이야기를 소개했었죠.


하늘에 관한 이야기였다는 것만 어렴풋이 떠오르는 그 일기. 지금 다시 읽어보고 싶어요. © 본인


제가 글 쓰는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솔직히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한 적은 없거든요. 저는 그냥 ‘남들 보기에 좋은’ 일을 하고 싶었어요. 좋은 언변과 암기력 때문인지 부모님은 내심 제가 변호사가 되길 바라고 법대 진학을 권하셨어요. 훌륭한 직업인데 제가 하고싶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이상한 외국어를 배우는 학교에 덜컥 지원했어요.


부모님 체면과 스스로의 가오를 위해 대외적으로는 ‘코트라 입사’나 ‘외무고시 준비’가 꿈이라고 말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연출가가 되고 싶었어요. 하늘이 12세 소녀에게 꿈을 그리는 붓을 내줬듯, 아름다운 영상에 멋진 음악과 대사를 담아 사람들에게 황홀한 순간을 선물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용기가 없었죠. 고등학생 때 예술을 하고 싶다고 넌지시 부모님께 귀띔을 했지만 철벽 거절을 당한 트라우마도 있었고요. ‘꿈을 이룰 수 없으면 구색이라도 갖춰야지’ 하는 생각으로 마음의 소리를 외면하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것을 지향하며 살았어요.  


글에 재주 없는 것 같지만 글밥을 먹고 삽니다. © 본인


그런데 돌고 돌아 결국 글밥을 먹고 살아요. 구린 표현이지만 인터뷰와 원고를 쓴 대가로 월급을 받으니 아주 틀린 표현은 아니죠. 정리한 생각을 글이라는 수단으로 공유했을 때 누릴 수 있는 기쁨을 처음 안겨준 사람이 바로 당신이에요. 그때까지 내게 일기는 그냥 숙제에 불과했으니까요.


12년의 학교 생활 동안 제게 큰 울림을 준 선생님은 거의 없었어요. 어떤 인간은 채찍질하며 재수를 권유했고 또 어떤 인간은 촌지를 주지 않는다며 저를 통해 엄마를 압박했죠. 그 악마 같던 인간들 틈바구니에서 내 일기를 읽어준 26살의 당신은 유일한 스승으로 기억되고 있어요. 꼭 한 번은 인사 드리고 싶었는데 아직도 당신을 찾지 못했네요. 혹시 지금도 교편을 잡고 계신다면, 아이들의 드러나지 않은 꿈들을 찾아주세요. 당신은 내 일기를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저는 그 순간을 선명히 기억한답니다. 보고싶어요 강민경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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