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은손 Apr 25. 2021

죽음 앞에서 욕망을 표출하기가 두려운 사람들

어르신, 더 살고 싶지요? 란 엄마의 물음

“딸 있지요. 근데 외국에 살아요. 살만큼 살았는데 뭔 욕심을 낸다고 잘 사는 애들을 불러요.”


인간은 자신이 바라는 바와 정 반대되는 말을 읊곤 한다. 엄마가 대학병원에서 만났던 할머니가 그랬다. 엄마가 진료를 기다릴 때 대기석에서 훌쩍거리는 한 노파를 발견했다. 의사에게 막 청천벽력 같은 소식들 접한 노파는 선택의 기로에 있었다. 수술과 치료. 두 선택지를 두고 고민하던 할머니에게 의사가 자녀와 같이 상의해보는게 좋겠다고 말하자 할머니가 위의 말을 한 것이다. 할머니의 손은 한없이 떨렸고 어깨엔 힘이 없었다.


역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던 엄마는 오지랖을 부려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어르신, 더 살고 싶지요. 그때부터 노파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엄마는 노파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내 딸도 저기 바다건너 살아요. 그나마 둘째는 가까이 사는데 회사에 막 들어가서 정신없어요. 그래서 첫째가 온대요. 지 새끼 두고 온다니까 마음 편하진 않은데 나도 살고 싶은 걸 어쩌겠어요. 할머니도 일단 가족들 귀국하라고 하세요. 할머니 원하는 대로 하세요. 지금 우리가 남 생각할 처지인가요. 노파는 너무 고맙다는 말과 함께 엄마의 손을 꽉 쥐었다. 천하제일의 심술쟁이에 자기 자신을 지독히 사랑하던 우리 엄마도 비자발적으로 외로운 투병, 최악의 경우 외로운 죽음을 택하려 하는 타인을 마냥 지켜볼 수 없었던 것이다.

 

산다는  뭘까, 아니 죽음이란  뭘까. 세상의 빛을 만나지 못해 평생을 원망으로 채워온 자의 구렁텅이 같던 삶도, 문명 사회에서 성취할  있는 모든 부귀영화를 누린 자의 양지 같은 삶도 결국은 죽음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죽음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마주해야 하는 선택지는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다. 최고의 의료시설에서 최선의 치료를 받으며 삶을 연명하다  감은 자도 있고 고시원에서 고단한 몸을 이다 영원히 눈뜨지 못하는 자도 있다. 후자의 경우 사실상 선택지란  없었던 상황이다.


엄마가 만났던 노인은 선택지는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어떤 선택을 할 자유가 없었다. 할머니의 자유를 박탈한 것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자녀의 자유를 점거해야 한다는 우려였다. 35년간 딸 둘을 키운 엄마는 할머니의 마음을 대번에 이해했다. 그래서 답답했나 보다. 딸에게 선택지를 넘겨도 될 상황에 할머니는 자신의 우려와 삶에 대한 욕심을 두고 망설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재난 영화를 보면 꼭 빌런이 나온다. 빌런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타인을 총알받이 삼는다. 그런 영화를 볼 때면 저 빌런이 한시라도 빨리 죽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현실 세계에서 타인(흉악범 제외)의 죽음을 간절히 바란 적은 없다. 내게 씨발년이라는 욕설을 내뱉았던 동네 할아버지도, 갑질 일색이었던 옛 집주인 아주머니도, 1분 1초가 인격 모독이었던 고3 담임 선생님도, 남의 불행을 삶의 동력으로 삶던 대학 선배도 죽음의 길에 이르는 훗날, 자신의 생존 방식을 채택할 수 있는 힘 정도는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다. 생존 욕구라는 최소한의 존엄은 보장됐으면. (존엄하게 눈 감기를 택한 사람들과는 결이 다르지만) 살고 싶은 사람들은 모두 그랬으면.

매거진의 이전글 부치지 못한 편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