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 더 살고 싶지요? 란 엄마의 물음
“딸 있지요. 근데 외국에 살아요. 살만큼 살았는데 뭔 욕심을 낸다고 잘 사는 애들을 불러요.”
인간은 자신이 바라는 바와 정 반대되는 말을 읊곤 한다. 엄마가 대학병원에서 만났던 할머니가 그랬다. 엄마가 진료를 기다릴 때 대기석에서 훌쩍거리는 한 노파를 발견했다. 의사에게 막 청천벽력 같은 소식들 접한 노파는 선택의 기로에 있었다. 수술과 치료. 두 선택지를 두고 고민하던 할머니에게 의사가 자녀와 같이 상의해보는게 좋겠다고 말하자 할머니가 위의 말을 한 것이다. 할머니의 손은 한없이 떨렸고 어깨엔 힘이 없었다.
역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던 엄마는 오지랖을 부려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어르신, 더 살고 싶지요. 그때부터 노파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엄마는 노파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내 딸도 저기 바다건너 살아요. 그나마 둘째는 가까이 사는데 회사에 막 들어가서 정신없어요. 그래서 첫째가 온대요. 지 새끼 두고 온다니까 마음 편하진 않은데 나도 살고 싶은 걸 어쩌겠어요. 할머니도 일단 가족들 귀국하라고 하세요. 할머니 원하는 대로 하세요. 지금 우리가 남 생각할 처지인가요. 노파는 너무 고맙다는 말과 함께 엄마의 손을 꽉 쥐었다. 천하제일의 심술쟁이에 자기 자신을 지독히 사랑하던 우리 엄마도 비자발적으로 외로운 투병, 최악의 경우 외로운 죽음을 택하려 하는 타인을 마냥 지켜볼 수 없었던 것이다.
산다는 건 뭘까, 아니 죽음이란 건 뭘까. 세상의 빛을 만나지 못해 평생을 원망으로 채워온 자의 구렁텅이 같던 삶도, 문명 사회에서 성취할 수 있는 모든 부귀영화를 누린 자의 양지 같은 삶도 결국은 죽음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죽음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마주해야 하는 선택지는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다. 최고의 의료시설에서 최선의 치료를 받으며 삶을 연명하다 눈 감은 자도 있고 고시원에서 고단한 몸을 뒤척이다 영원히 눈뜨지 못하는 자도 있다. 후자의 경우 사실상 선택지란 게 없었던 상황이다.
엄마가 만났던 노인은 선택지는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어떤 선택을 할 자유가 없었다. 할머니의 자유를 박탈한 것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자녀의 자유를 점거해야 한다는 우려였다. 35년간 딸 둘을 키운 엄마는 할머니의 마음을 대번에 이해했다. 그래서 답답했나 보다. 딸에게 선택지를 넘겨도 될 상황에 할머니는 자신의 우려와 삶에 대한 욕심을 두고 망설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재난 영화를 보면 꼭 빌런이 나온다. 빌런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타인을 총알받이 삼는다. 그런 영화를 볼 때면 저 빌런이 한시라도 빨리 죽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현실 세계에서 타인(흉악범 제외)의 죽음을 간절히 바란 적은 없다. 내게 씨발년이라는 욕설을 내뱉았던 동네 할아버지도, 갑질 일색이었던 옛 집주인 아주머니도, 1분 1초가 인격 모독이었던 고3 담임 선생님도, 남의 불행을 삶의 동력으로 삶던 대학 선배도 죽음의 길에 이르는 훗날, 자신의 생존 방식을 채택할 수 있는 힘 정도는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다. 생존 욕구라는 최소한의 존엄은 보장됐으면. (존엄하게 눈 감기를 택한 사람들과는 결이 다르지만) 살고 싶은 사람들은 모두 그랬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