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은손 Jun 03. 2022

이 커피엔 영혼이 없어

싸이월드가 찾아낸 알바 잔혹사

고등학교 친구 싸이월드에 미스터도넛 센텀 신세계점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시절의 내 사진이 떴다. 저 때 친구는 엄청 비싼 카메라 들고 다니면서 우리들의 알바 현장을 급습하곤 했는데, 나도 고된 노동의 현장을 실시간으로 보여줬었다.


사진을 보니 옛 기억이 난다. 내가 했던 곳은 백화점 입점 매장이라 진상 손님 백화점이었다. 던킨 쿠폰을 들고 와서 무료 도넛 내놓으라고 엄포하는 손님은 귀여운 수준이었다. 백화점에서 돈 몇 천 썼다고, 백화점 자주 방문한다고 자기가 현송월급 귀빈인 줄 아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카드 긁으면 포스가 화면에 등급 정보가 떴는데 등급이 정말 높은 분 중에 '내가 이 백화점에서 얼마를 썼는데~'를 전제로 이상한 요구를 한 손님은 없었다) '스타벅스에선 이거 해주는데 왜 여기선 안해줘요?'란 이에겐 니가가라 스타벅스, '서울 매장에선 된다는데 이상하네?'란 이에겐 니 얼굴이 더 이상하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꾹 억눌러야 했던 나날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미친 인간은 뉴욕 커피 가오맨이다. 바닥 청소를 하고 있는데 어떤 중년 남자가 날 불렀다. "자네 잠시 여기로 와보게." 고개를 돌려보니 야시꾸리한 올림 머리를 한 여인이랑 부담스러운 이글 아이에 더 부담스러운 자켓을 입은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내 캐논 디카를 걸고 말하건대, 둘은 부부가 아니다.


-"자네, 이 커피엔 문제가 있네."

"네 고객님 무슨 문제이실까요? 커피가 식었을까요?"

-"자네 여기 커피 마셔본 적 있나."

"아 네 있습니다."

-"문제를 못 느꼈나."

"?!!!(작은손둥절)"

-"이 커피엔...영혼이 없어...뉴욕에서 커피를 마셔봤으면 이건 좀 아니라고 느낄걸세."

"환불해드릴까요?"


커피에 영혼을 따지다니. 커피가 납골당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뉴욕에서는 떠난 이의 넋을 커피잔에 담아 추모하나 보다. 올림머리 아줌마는 가오맨이 22살짜리 붙잡고 훈계하는 모습을 다비드상 보듯 바라본다. 멋지지 않은 것을 멋진 걸 보는 눈빛으로 보는 아줌마가 좀 측은하게 느껴졌다. 진짜 멋진 걸 본 적이 없구나. 그들이 떠난 후 커피잔을 확인했더니 남김없이 다 마셨다. 문제가 있는 커피를 다 마시다니. 문제 해결에 적극적인 타입인가보다.


많이들 인생 내공을 쌓기 위해 어릴 때 꼭 알바를 해봐야한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내공이 '항마력 딸리는 인간을 대하는 능력'를 뜻하는 것이라면 정말 그렇다. 미스터도넛 센텀점 근무 이후 항마력을 갉아먹는 부류의 사람을 접하면 스트레스 받기보단 웃음부터 터지기 때문이다. 혹시나 내가 맥락없이 웃음을 터뜨린다면 그건 항마력이 딸린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죽음 앞에서 욕망을 표출하기가 두려운 사람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