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p. 6 순천 선암사

아담한 마을 같은 산사에서 '좋다좋아'를 외치다

by 김벼룩

“아, 숲 냄새 좋다.” “아, 개울 소리 좋다.” “좋다, 좋아. 좋다, 좋아.”

숲길은 개울 옆을 따라 이어져 있다. 길은 길지도 짧지도 않다. 개울은 깊지도 얕지도 않다. 개울에 걸쳐진 무지개다리 승선교는 높지도 낮지도 않다. 사찰은 좁지도 넓지도 않다. ‘모든 것이 딱 좋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번 트립에는 게스트가 있었다. 김벼룩과 이다까씨의 사찰 기행을 늘 부러워하는 동무들인데 시간이 맞아 함께 올 수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순천으로 가는 차 안에서 배우자와 연애 시절 웬만한 산과 절을 다 돌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20대 청춘남녀가 카페 가고 클럽 가기도 모자란 시간에 산이 웬 말이고 절이 웬 말이냐. 어쨌든 그 동무의 추천으로 다시 한번 순천, 이번에는 선암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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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들이 개울 옆 숲길을 따라 걷고 있다. 개울옆으로 신선이 내려오는 누각이라는 뜻의 강선루(降仙樓)가 보인다


선암사는 그야말로 모든 게 딱 적당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절이다. 순천 조계산 자락에 있지만 깊은 산속은 아닌 적당히 고즈넉한 숲 속에 위치한다. 무지개다리를 지나 제일 먼저 보게 되는 것은 역시 크지도 작지도 않은 연못이다. 달걀 모양의 타원형 연못 안에 메추리알 같은 타원형 섬이 있다. 원형이나 네모반듯한 연못만 보다가 타원형은 좀 새롭다.(나중에 찾아보니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정원에서는 직선적인 연못 양식이 지배적이었고, 통일신라시대에 조성한 불국사의 구품연지(九品蓮池)는 정타원형이라서 그 중간 시기 어디쯤이지 않을까 싶단다.)

선암사 삼인당.jpg 타원형 연못 삼인당

사찰의 초입에서 늘 만나는 문이 일주문(一株門)이다. 여기를 지나면 이제부터 절이구나~ 싶은데, 어? 선암사 일주문은 좀 다르다? 뭐지, 뭐지? 어떻게 다른 거지? 고민 끝에 찾아낸 답은 선암사의 일주문에는 담이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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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은 절이 시작되는 곳이다. 이 문을 들어서면 세속을 떠나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간다. 일주는 1줄의 기둥이라는 뜻으로 기둥 2개를 세우고 그 위에 보통 맞배지붕(맞배지붕이 궁금하다면 번외편 3. 사찰의 지붕 편 참고 https://brunch.co.kr/@handsup/12)을 올려 일주문을 만든다. 한 칸짜리 문이라 문짝이 없으므로 항상 열려있다. 그래서 담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선암사의 일주문은 담이 있을까? 사실 정확한 답을 구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절 경내를 둘러보고는 나름의 이유를 찾았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선암사는 모든 것이 고만고만했다. 눈에 띄는 보물이나 문화재도 크게 없었고, 대단한 불상도 가람도 없었다. 규모가 소박한 대웅전은 우리가 갔을 때 심지어 공사 중이었다. 그런데 둘러보다 찾아낸 특별함은 전각의 구역별로 나지막한 돌담이 둘러쳐져 있다는 것이다. 대웅전의 영산회상도보다도 앞마당의 삼층석탑보다도, 팔상전과 원통전보다도, 그 좋다는(?) 뒷간보다도 내 눈을 끈 것은 낮은 돌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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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가 급하지 않은 평평한 땅에 법당이나 전각별로 낮은 돌담이 둘러있다 보니 아담한 마을 같은 느낌이었다. 담이 있으니 골목이 생기고 골목이 있으니 작은 마을이다. 집집마다 돌담을 쌓아 구역을 나누긴 했으나 담이 낮아 이웃이 무얼 하는지 다 넘어다 볼 수 있는 그런 마을 말이다.


돌담을 따라 걷다가 선암사 생불이라는 누워있는 소나무 와송(瓦松)을 보니 상상력이 날개를 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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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 와송 전설(created by 김벼룩)

선암사의 새벽은 늘 안개로 열렸다. 돌담 위로 얇은 구름이 흘러가고, 대숲 사이로 물소리가 번져왔다. 비구니가 된 여인은 계단을 쓸며 하루를 맞았다. 그 손길은 담담했으나, 마음 깊은 곳에는 늘 오래된 그림자가 남아 있었다.

그림자의 이름을 가진 사내가 있었다. 그는 신도도 아니고, 행자도 아니었다. 그저 절집의 잡일을 도맡아 하며 여인의 곁을 맴돌았다. 장작을 패고, 마당의 돌을 고르고, 산길의 잡초를 매며, 말없이 절의 일부가 되었다. 그는 끝내 말을 걸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숙인 채, 오래전 세속에서 놓친 인연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인은 그를 알아보았다. 한때 함께 걸었던 사람. 그러나 이제는 삭발한 머리칼 아래에서 더 이상 불러서는 안 될 이름이었다. 밤이면 그는 누운 소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천년을 버티며 땅에 몸을 기댄 그 소나무는, 마치 세속과 불가 사이에 가만히 드리운 다리 같았다.

세월은 그들을 멀리 데려갔다. 사내의 손등은 거칠어지고, 얼굴은 산바람에 깎여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그의 자리는 텅 비었지만, 여인의 눈에는 누운 소나무가 더욱 또렷이 들어왔다. 거대한 몸을 낮게 눕힌 채, 묵묵히 세월을 지탱하는 그 나무. 여인은 문득 생각했다. 그 사내는 떠난 것이 아니라, 저 나무처럼 절집의 시간 속에 뿌리내린 것이라고.

바람이 불면 소나무 가지가 천천히 흔들렸다. 그것은 이별의 손짓이 아니라, 여전히 곁에 있음을 알리는 숨결 같았다. 여인은 고개를 숙여 염불을 외웠다. 사랑이란 결국 붙잡는 것이 아니라, 낮게 엎드려 오래도록 지켜내는 것임을, 누운 소나무가 말해주고 있었다.



문화유산이라는 뒷간보다는(설명에 의하면 놀랍게도 남녀가 구분되어 있단다!) 배롱나무 꽃사진 찍기 바쁜 건 우리 나이 탓인가....... 그래도 뒷간보다는 꽃을 보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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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의 미술인 대웅전의 영산회산도와 칠석각의 칠성도는 선명한 발색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대웅전이 공사 중이라 뭔가 빠뜨리고 나온 것 같은 느낌이다. 혹시 선암사 여행계획이 있다면 공사일정을 체크해 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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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의 또 다른 명물인 선암사 고양이 보살은 일반 츄르를 주면 먹지 않는다. 훈련이 잘 된 것인지 입맛이 까다로운 것인지 아니면 스님들과 함께 채식 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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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오는 길에 한차례 소나기가 내렸다. 해는 쨍쨍한데 빗줄기가 꽤 굵다. 호랑이가 장가가는 날이냐 여우가 시집가는 날이냐 떠들던 동무들이 즐거워 보이는 것은, 소나기를 우산 없이 맞은 것도 비를 피한답시고 성긴 나뭇가지 아래에 몸을 숨긴 것도 초등학교 졸업 이후로는 거의 처음이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하루 종일 '좋다'를 외치기, 잠시 속세를 잊고 초등학생의 마음으로 돌아가기. 모두 다 고즈넉한 산사니까 가능한 것이렸다.


선암사 앞의 **식당은 유명세에 비해서는 소박했다. 하지만 찬이 줄줄이 나오기 시작하자 역시 좋다좋아!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전라도 음식 절대로 의심하면 안 된다는 걸 한차례 더 깨닫고 돌아간다.(사실 너무 시장해서 금강산도 식후경 했다는 건 동무들과의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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