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두 번 죽였던 말들
맨 처음 정신과 상담을 받았던 것은 대학교 내 학생 상담센터를 찾았던 2015년, 대학교 4학년 봄. 그 이후로 시간이 흘러 직장인이 된 지금까지 나는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위기를 겪을 때면 으레 정신과 병원을 찾는다. 처음에는 정신과 상담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괴로웠다. 나 자신이 얼마나 나약하고 초라한 존재인지 인정해버리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 어느 누구에게도 내가 상담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가끔 상냥한 누군가가 요즘 힘들어 보인다며 궁금한 표정을 지을 때면 별일 없다는 듯 옅은 웃음을 지었다.
나약하고 초라하게만 느껴졌던 내 모습을 단단하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 바라보게 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상담을 통해 선생님과(라고 하지만 사실 나 자신과) 무수한 대화를 나누며, 나는 나를 '그깟 마음고생 하나 제대로 겪어내지 못해 정신과 병원을 전전하는 패배자'가 아닌, '나의 행복을 되찾기 위해 채 아물지 못한 상처들을 기꺼이 헤집는 용자'라고 생각하게 됐다. 정신과 상담을 받는다는 것은 볼품없는 내 모습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돌보기 위한 방법 중 하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숨길 일도 아니었다.
그때부터 나는 사람들의 궁금한 표정에 옅은 웃음 대신 '요즘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다'고 대답하기 시작했다. 가까운 이들부터 한 명씩,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얘기했다. 반응은 놀랍도록 제각각이었다. 그중 어떤 말은 나를 다시 살게 했고, 또 어떤 말은 나를 두 번 죽였다.
마음이 아픈 분들과, 그들을 곁에 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며 그 기억들을 재조립해본다.
# 어땠어?
꾹꾹 눌러 담아왔던 마음들을 무장해제 시키는 마법의 질문. 저 별거 아닌 세글자에는 정신과 상담받는 것을 유난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태도와 나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애정이 담겨있다. 이내 마음이 편안해진 나는 상담을 받으며 선생님과 나눴던 대화와 그 안에서 내가 느꼈던 감정들을 상대에게 하나둘씩 꺼내놓곤 한다.
# 잘하고 있어.
나 자신을 '패배자'가 아닌 '용자'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 말. 평소 감정표현을 잘 하지 않아 상처를 곪게 만들곤 하는 내 모습을 잘 아는 오랜 친구들은 병원에 다닌다는 나의 말에 알맹이 없는 걱정 대신 진심 어린 격려로 호응해줬다. 주저앉아 울기만 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대단하고, 대견하다고. 그렇게만 하면 된다고. 잘하고 있다고.
# 좋아 보인다.
상담을 받으며 조금씩 나아지는 내 모습을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느끼고 있다는 증거. 내가 매주 병원에서 눈물 콧물 짜며 삽질하고 있는 건 아니구나, 안도감을 줬던 말이다. 마음의 긍정적인 변화가 말과 언어와 몸짓으로 자연스럽게 배어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회복에 가속도가 붙는다.
# 버텨줘서 고마워.
그리고 나를 끝내 울렸던 오래된 친구의 한마디. 오랜만에 만나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요즘 병원에 다니고 있다는 얘기를 털어놓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이었다.
고생했고 그동안 버텨줘서 고맙다는 말에 결국 참았던 눈물을 뚝뚝 떨구고 말았다. 나조차 놔버리고 싶었던 나 자신을 이토록 아껴주는 존재라니. 순식간에 나를 소중한 사람으로 만들어준 친구의 한마디는 지금까지도 나를 꽉 붙들어주고 있다.
※ 물론 나를 두 번 죽였던 말도 있다.
# 야, 다 힘들어. (=너만 힘드냐?)
다소 클래식한 상용구나, 마음의 상처가 깊은 사람에게 쓸 경우 입병에 알보칠을 들이붓는 것과 같은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일말의 공감도, 배려도 없는 무책임한 위로. 안 그래도 '내가 너무 나약한 게 아닐까' 걱정하던 나를 한순간에 유난 떠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놀라운 말이다.
여전히 가끔 병원에 가고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그 사실을 얘기하곤 한다. 위로를 빙자한 동정과 뜻 모를 편견에 찔릴 때도 있지만 따뜻한 격려와 든든한 응원이 그보다 더 많으니 괜찮다. 언젠가는 나 또한 진심이 담긴 말로 누군가를 잠시나마 살릴 수 있게 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