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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닐 Feb 18. 2020

사사로운 역사

첫사랑이라고 여기던 것



스무 살 적 나는 네게 전하고 싶은 말이 그렇게도 많았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 그즈음에 줄지어 놓인 나의 날들이 빼곡히 너로 채워져 있었다는 게. 처음부터 수많은 우연들이 모여서 정체 모를 애정이 소리 없이 견고해졌던 것 같아. 요동치는 감정들을 나는 감당할 재간이 없었고 쌓이다 쌓이다 넘쳐버리면 삐죽하게 튀어나와 서툴고 유치하게 닿았었겠지.

목적 없던 나의 마음은 그래도 가끔은 속상했고 질투 났고 돌연히 너를 잃게 될까 불안함에 울었지만 결국에는 그저 내가 이다지도 마음 쓰는 사람이 너라는 게 좋았어. 어쩌면 전혀 닿지 않는 인연으로 휘발될 수 있었는데 그렇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너는 나에게 유일하고 특별하게 반짝였고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 같아 마음 놓고 오래 보는 것도 쉽지 않았거든. 처음 보는 보석을 대하는 사람처럼 굴었던 것 같아. 하나의 대상에게 이 같은 감상들을 가진다는 것이 생소한 경험이었지.


혼자 내달린 감정선들을 그만 끊어내고자 했던 게 스무둘 새해였어. 그러고도 나는 오랜 시간을 너의 기억으로 드리워진 그림자 밑에 살았어. 몇몇의 인연들이 스쳐가는 동안 그럼에도 여전히 너의 꿈을 꿨고 너희 향기를 좇았어. 그게 아니면 너의 목소리를 또렷하게 기억해내고자 애를 쓰기도 했고. '나는 누군가를 더 깊이 여길 수 있었는데, 왜 너에게 그러지 못하고 미안해하게 되는 걸까' 다른 인연들에게 회의적인 질문만 하게 되는 나를 자책했어.


그렇지만 그 출발점에서부터 멀어질수록 자츰 무던해지기도 했어. 종지엔 그때는 내가 어려서, 처음이었어서 더 열병으로 앓았을 거라고. 실은 그렇게 대단한 감정의 실체도 아니었을 거라고 뒤늦은 비평을 늘어놓는 날도 오더라. 그렇게 할 수 있을 때까지 5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지만.

아무것도 아닌 사이였던 너를 놓는 게 이렇게나 오래 걸릴 일인가 싶어. 나는 그래서 내가 원래 미련한 사람이거나 걸음이 아주 느린 사람일까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더라고. 돌이켜보면 나는 쉽게 사람을 좋아했고 또 그만큼 쉽게 마음이 떠나거나 간편히 정리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





이번 겨울은 운이 좋게도 나는 너를 곁에 둘 수 있었지. 이 자체로 믿기지 않는 황홀이어야 하는데 염치없이 다음 봄에도 여름에도 너를 바라고 있어. 나는 이미 많은 시간을 낭비해온 것 같아. 너무 오랜 날들을 너를 잃어왔잖아. 우리의 시선이 교차하고 함께 웃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나는 좀 더 지난 허비된 시간을 후회하고, 좀 더 하루도 빠짐없이 너를 잃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돼.


너 없이도 아주 많은 시간 동안 나는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멋진 장소에 있었었는데. 근래 들어 우리가 함께한 작디작은 것들이 나에겐 가장 큰 행복이 되었어. 함께 본 영화들이 더 사랑스럽고 함께 있던 장소들이 더 각별해져서 그것들 그리고 그 위로 입혀진 그날의 너를 조금도 잊을 수 없을 것 같아. 우연히 우리가 바라던 여행이 같아서, 머물고 싶은 장소가, 직접 듣고 싶은 음악이, 기다려온 영화들이 같아서 기뻤고 같은 것에 행복해할 수 있다는 게 감사했어.


나 자신이 위태로워서 나있던 욕망과 못난 도피의 갖가지 줄기들이
단 하나의 뿌리로 귀결되어
결국은 그랬구나.
너의 두 팔 안에서는 그런 끝도 없는 평온에 잠기었다.


네가 나를 바라볼 때 나는 그 안에서 영원히 살아있고, 이젠 너를 볼 때면 영원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


그렇게 나는 지금 다시 너를 사랑하고 있구나.

먼길을 나섰는데도 결국 같은 곳을 찾아왔나봐. 아니 어쩌면 조금 다른 위치인 것 같아. 지금의 나는 너를 아주 친밀하게 느끼고, 그때의 내 표현들이 부끄럽기도 해. 어릴 때는 일반적이고 흔한 사랑의 형태에 내 애정을 끼워 맞췄던 것 같아. 지금 보면 한 순간도 그런 형태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여전히 나는 이 묵직한 마음이 어떤 형태인지는 잘 모르겠어. 그렇지만 어떤 곳에서부터 자꾸만 나는 네가 필요하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 명확한 증거도 없지만 너는 나에게 운명적 존재 그 비슷한 것이라고. 그때도 느꼈던 것이 아직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착각이 아니었다고. 그때도 착각이었을 수 있고 지금도 착각일 수 있지. 나는 그것을 분별할 만큼 현명하지 못해. 하지만 그게 무엇이 되었든 그 아래서 나는 분명하고 끊임없이 너를 부르고 있어. 처음 어렴풋이 마음을 전했던 선선했던 날 그리고 5년이 지나 다시 준비도 없이 말해버렸지. 그 날처럼 계획도 멋도 없는 문장으로. 다른 점은 예전처럼 마음이 허무하거나 애타지 않는다는 거야.


작년 봄에 피고 진 꽃이 일 년이 지나 그 자리에 다시 다른 향으로 핀다면,
그 꽃은 여전한 것일까 아니면 완전히 다른 꽃인 걸까.
나는 이 질문처럼, 나에게 다시 찾아온 이 마음이 반갑고도 혼란스러워.


그때는 이유모를 불안함에 밤을 지새웠다면 지금은 그렇지 않아. 지금은, 조금 이상한 말이지만 내가 나이고 네가 너라는 것에 슬픔을 느껴. 근원을 알 수 없는 슬픔이라고 생각했어. 그냥 어느 순간 문득 그렇게 느꼈던 것 같아. 내가 너를 온전히, 남김없이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일까. 그보다는 우리가 한순간도 따로 존재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인 것 같아. 모든 사람이 서로 다른 존재인 걸 알면서 네가 내가 아닌 것은 은은한 슬픔으로 다가와. 우리가 새로운 하나로 존재한다면 좋겠어. 이제야 올리버와 엘리오가 왜 자신의 이름으로 서로를 불렀는지 그 이름을 부르는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알 것 같은 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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