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보일드, 펄프 픽션에서 문학으로

03. 김언수 - 뜨거운 피

by 박종혁

부산은 한국 사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도시다. 경제적으로든 역사적으로든, 아마 한국 사회의 영원한 일부로 남을 것임에 틀림없다. 가령 어떤 도시는 스토리적 색채가 도드라지지 않는 무채색에 가까울 수 있겠지만, 부산은 그렇지 않다. 수많은 인간 군상들과 역사가 덧대어 칠한 부산의 스토리적 색채는 그 자체로 강렬하다. 그 어떤 스토리가 쓰여도 충분히 개연성을 가질 수 있는 장점을 가진 도시다.


《뜨거운 피》의 배경은 구암(狗巖)이다. 실제로는 없는 가공의 지명이다. 소설 중에서는 남포동, 완월동, 영도처럼 실제 지명도 나오지만 그 비중은 구암에 비해 크지 않다. 작중 구암은 한마디로 별 볼일 없는 동네다. 해운대나 광안리처럼 사람과 돈이 모이는 곳이 아니다. 하물며 감천항처럼 물류가 모여드는 곳도 아니다. 오죽하면 소설의 첫문장은 ‘구암(狗巖)의 건달들은 아무도 양복을 입지 않는다.’로 시작한다. 조금이라도 돈만 있으면 ‘가오’잡기 바쁜 건달 세계에서, 구암의 건달들은 양복 다려 입기보다도 먹고 살기 바쁠 정도로 구암은 낙후된 지역이다.


주인공 희수는 구암 해수욕장에 위치한 이 층짜리 호텔, 만리장 호텔의 지배인이다. 하지만 지배인은 그저 허울에 불과하다. 실상은 호텔의 주인인 손 영감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마흔 살 건달이다. 나이를 먹으니 싸움 실력이나 체력도 예전 같지 못하고, 처자식도 없으니 삶의 목표도 딱히 없다. 그러던 그가 선배 양동의 제안으로 손 영감을 떠나 새 사업을 시작 해보려 하지만, 부산의 암흑가는 그의 길을 번번이 가로막는다.


작품은 전반적으로 1993년의 부산의 봄과 여름, 그 사이에 마흔 살 건달 희수가 겪는 절망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사실, 희수의 욕망은 다른 인물들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 부산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남가주 회장이나 천달호에 비하면 그저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싶을 뿐이다. 사랑하는 여인 인숙, 가슴으로 낳은 아들 아미와 그저 소소하게 행복을 보내고 싶지만, 건달의 족쇄는 그를 번번이 절망으로 끌어내린다. 하지만 이런 희수에게 선배 양동은 다음과 같은 충고를 건넨다.


“니는 씨발 정신이 없다.”
씨발 정신은 또 뭐냐는 듯 희수가 양동을 쳐다봤다.
“니는 너무 멋있으려고 한다. 건달은 멋으로 사는 거 아니다. 영감님에 대한 의리? 동생들에 대한 걱정? 사람들이 너에 대해서 하는 평판? 좆까지 마라. 인간이란 게 그렇게 훌륭하지 않다. 별로 훌륭하지 않은 게 훌륭하게 살려니까 인생이 이리 고달픈 거다. 니가 진짜 동생들이 걱정되면 손에 현찰을 쥐여줘라. 그게 어설픈 동정이나 걱정보다 백배 낫다. 니는 똥폼도 잡고 손에 떡도 쥐고 싶은 모양인데 세상에 그런 일은 없다. 우리처럼 가진 게 없는 놈들은 씨발 정신이 있어야 한다. 상대 앞에서 배 까고 뒤집어지고, 다리 붙잡고 울면서 매달리고, 똥꼬 핥아주고, 마지막에 추잡하게 배신을 때리고 우뚝 서는 씨발 정신이 없으면 니 손에 쥘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세상은 멋있는 놈이 이기는 게 아니고 씨발놈이 이기는 거다.”


희수는 옛 건달이다. 의리로 살아왔고, 그 의리가 손 영감의 곁을 20년 동안 지킨 원동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생들, 인숙, 아미에게도 의리를 지키려할 뿐이다. 그러나 양동은 그런 희수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씨발 정신’으로 대표되는 처절함이 없기 때문이다. 살아남으려면 처절해야 한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김언수 역시도 하드보일드는 비참한 현실에도 꿋꿋이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김언수는 현재 한국 현대문학에서 정유정과 함께 가장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에 선 작가다. 소설 속 인물과 사건의 깊이를 보여주면서도 장르적 긴장감과 재미를 잃지 않는다. 전작 《설계자들》이 주인공 래생의 사적인 이야기를 다뤘다면, 《뜨거운 피》는 주인공 희수의 이야기면서 작가의 고향인 부산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인물뿐만 아니라 그 배경도 주인공인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주인공과 주변인물 간의 유사가족관계를 부각하여, 가족 개념이 한국 사회에서 갖는 의미도 재조명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뜨거운 피》는 한국형 하드보일드가 나아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그 방향을 제시해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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