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보일드, 펄프 픽션에서 문학으로

03. 하세 세이슈 - 진혼가

by 박종혁

쇼와 시대의 종말과 함께 일본의 경제는 추락하기 시작했다. 일본 경제 전반에 가득 찼던 버블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버블의 붕괴가 헤이세이 시대의 시작을 정면으로 강타했고, 그 여파는 일본의 대표적인 암흑가인 신주쿠도 바꾸어 놓았다. 전통적인 일본계 야쿠자들이 주름잡던 신주쿠가 이제까지 아웃사이더였던 대만계와 중국계 조직들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다. 신주쿠 사태의 이면에는 전후 잔류고아 2~3세 문제와 대만의 일청운동(一淸運動)등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버블 경제의 붕괴가 가장 주된 원인으로 지적된다. 신주쿠, 그 중에서도 가부키초는 더 이상 일본인의 구역이 아니게 되었다. 버블이 꺼진 유흥가엔 낭만은 없고 잔혹함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하세 세이슈의 《진혼가》는 출발한다. 전작《불야성》의 주제를 그대로 간직하면서 스케일을 확장한 이 소설은 마치 같은 이야기의 변주로 느껴진다. 더 강렬해진 폭력 묘사는 자칫 반감이 들 수도 있는 수준이지만, 그만큼 이 소설이 전하고자하는 메시지를 가감 없이 확실하게 전달해준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대만계 킬러 궈추성(郭秋生)과 일본인 전직 경찰 타키자와 마코토(滝沢誠)다. 추성은 대만계 조직의 보스 양웨이민(楊偉民)이 비밀리에 키운 킬러다. 일본 사회의 아웃사이더인 대만인들 중에서도 아웃사이더인 인물이다. 인생에 목표는 깊은 산 속에서 개를 키우는 삶을 사는 것, 그 이외에는 없다. 그저 양웨이민의 수족으로 살아갈 뿐이다. 타키자와는 추성의 반대다. 그는 주류 사회의 일원인 일본인이면서 전직 경찰이다. 그러나 소설이 진행될수록, 둘의 차이는 모호해진다.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추성과 타키자와는 근본적으로 같은 인물로 느껴진다. 공통적으로 둘은 자신의 어두운 기억에서 도망치기 위해 현재를 살아간다. 추성은 어릴적 누이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과 아버지에 대한 혐오에서 벗어나고자 양웨이민에게 몸을 의탁했다. 타키자와는 일본인이지만, 중국계가 지배하는 암흑가에선 조직에 빌붙어 기생하는 아웃사이더에 불과하다. 가짜 경찰 수첩과 수갑은 그가 부릴 수 있는 최대한의 무기이자 허세다. 두 인물 모두 내면의 어둠에서 도망치기 위해 가부키초에서 버텨나갈 뿐이다. 《진혼가》 전체의 이야기가 전작의 변주지만, 추성과 타키자와의 이야기도 결국엔 같은 맥락이다.


한편, 이 소설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문체다. 제임스 엘로이의 영향을 진하게 받은 듯한 문체는 단문을 넘어서서 초단문의 형태로 발전했다. 하세 세이슈는 이 작품에서 명사형으로 종결되는 문장의 빈도를 전작에 비해, 그리고 다른 하드보일드 작품에 비해 비약적으로 높였다. 이러한 초단문은 다음과 같은 소설의 본문에서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무용한 시간. 애태워 봐야 어쩔 수 없다. 지아리를 생각했다. 타키자와를 생각했다.
지아리.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차 안에서의 싸늘한 목소리, 냉랭한 시선. 여차하면 지아리는 추성을 버리리라.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타키자와. 추성을 쳐다보는 시선, 태도. 옛 기억이 떠오른다. 대만의 린. 분위기가 어딘가 모르게 닮았다.


한편 전작에 비해 《진혼가》의 문학성에는 아쉬움이 있다. 발표 직후 일본 사회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불야성》에 비하면 로포르타주적 성격은 덜하고 소설의 성인 엔터테인먼트화가 짙기 때문이다. 특히 폭력과 성애에 대해 지나치게 자극적인 묘사가 이 소설이 비판받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성공적인 속편으로서 비평가들과 독자들에게 여전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 이유는 한층 진일보한 하세 세이슈의 문장력과 여전히 소설 속의 잔인함이, 첫 출간 당시 1997년의 현실과 크게 괴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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