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 고흐, 피카소, 앤디 워홀.. 미술이야기를 할 때 종종 언급되는 인물들이 있다. 특히 후대로 올수록 피카소와 앤디 워홀은 더더욱이다. 나 역시 다른 글에서도 '피카소가 부러워하던', '피카소가', '피카소가..' 라며 언급을 한 적이 있다. 앤디 워홀은 어떨까. 현존하는 팝 아티스트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낼 때 '제2의 앤디 워홀', '영국의 앤디 워홀'이라고 칭한다.
그리고 오늘 소개할 그 역시,
두 인물을 빌려 먼저 소개하고 싶다.
피카소의 재능을 질투했던 인물이자, 앤디 워홀 이전의 미국 대표 화가였던- 한 컬렉터의 '발견'에서 미국의 '선택'으로 나아간 예술가,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 1912~1956)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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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렉터 + 평론가 + 시대, 삼박자가 맞았다
- 그를 알아본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이 첫 전시를 열어주었고 경제적인 후원을 했다
- 이젤이아닌 바닥에서작업했다
-물감을 흘리고 뿌리는 작업방식은 대박이 났다
-'미국을 대표하는' 화가에 그의 자유분방함이 선택되었다
그의 예술성 및 천재성을 존경한다.
더해서 그의 '운'이 참 부럽다.
'컬렉터, 평론가, 시대' 세 가지가 이렇게 잘 맞은예술가가 얼마나 될까.
잭슨 폴록을 내 글에서 가장 먼저 언급했던 건 컬렉터인 '페기 구겐하임'을 담았을 때다. 아트 컬렉터 페기가 그를 알아봤고, 자신의 갤러리에서 첫 전시를 열어주었으며, 경제적인 후원을했다. 평론가 그린버그는 그의 예술성을 알아봤고, 많은 예술가들에게 그를 소개하는 정신적인 후원가였다. 두 사람 덕분에 잭슨 폴록은 유럽의 작가들과 교류를 하며 점차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갔다. 여기엔 그의 아내이자 여성화가인 리 크래스너(LeeKrasner)의 열렬한 내조도 뺄 수가 없다. 시대는 또 어떠했는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술의 중심이 파리에서 뉴욕으로 넘어왔던 시기이다. 많은 유럽 작가들이 미국에서 예술활동을 펼칠 그 시기에 잭슨 폴록도 있었다. 당시미국은 '미국의 미술사'에 등장시킬 '미국 대표작가'가 필요했다.
또한 그의 '자기 파괴적'인 성격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성장'을 도왔다. 정신과 상담을 통해 알게 된 내면세계는 이후 그의 작품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결국 잭슨 폴록은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서 물감을 흘리고 뿌리는 그 과정 자체까지 '예술'로 만든아티스트로 거듭났다.
좌) 잭슨폴록 '속기술의 인물형상', 우) 잭슨폴록 '암이리'
처음부터 인기가 많던 예술가는 아니었다. 그의 작품을처음 본 페기 구겐하임은 '그림이 성의가 없는 것 같아요'라고 얘기를 했다. 추상, 초현실주의, 큐비즘까지 받아들인 그녀 역시 잭슨 폴록의 그림을 '난해'하게 본 것이다. 물론 그녀의 이러한 생각은 몬드리안의 말 한마디에 달라진다.
'저는 미국에서 본 그림 중에 가장 흥미롭네요'
몬드리안의 조언을 받아들인 페기는 그와 계약을 했으며, 1943년 11월 9일, 첫 개인전을 열어준다. 이를 발판으로44년도에 그의 기사가 실렸으며,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위의 오른쪽 그림인 '암이리(She Wolf)'를 판매하는 성과를 냈다.
이렇게 그는 한 컬렉터의 '발견'에서 예술세계를 시작했다.
좌) 피카소 '게르니카', 우) 잭슨 폴록 '사람,황소,새'
좌) 피카소 '거울 앞의 소녀', 우) 잭슨 폴록 '달의 여인이 원을 자르다)'
흔히 우리가 아는 잭슨 폴록의 그림은 물감이 흘리고 뿌려져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 그림 이전에는 다양한 작품들이 존재한다.
피카소의 재능을 질투했던 그는 동시에 피카소를 존경했다. 위의 두 작품은 피카소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닮은 듯 다른 구성과 색감은 그가 얼마나 피카소의 작품을 연구하고 해석했을지, 비교해보는 재미까지 있다. 더해서 멕시코 화가들의 벽화와 유럽의 추상주의 작가들도 그의 작품에서 뺄 수 없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것을 '잭슨 폴록'만의 스타일로 만들어갔다. 그 자신도 모르게 '미국이 원하는' 미술의 세계로 들어서고 있던 것이다.
라이프지에 소개된 잭슨 폴록
결정적으로 그가 '뜬'계기는 한 잡지였다.잭슨 폴록의 자기 파괴적인 성향을 아는 컬렉터 페기는 그를 평화로운 마을로 보냈다. 이후 일정한 수입을 주며 작품에 매진할 수 있도록 후원을 했다. 이미 멕시코 화가들의 영향과 페기 구겐하임의 벽화 의뢰로 '대형 작품'에 눈을 뜬 그는, '이젤'이 아닌 '바닥'에 그림을 내려놓게 된다. 더 이상 이젤에 그리는 그림은 그가 표출하는 내면세계를 담아내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게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도 예술이 되는 '액션 페인팅'과 그만의 트레이드 마크인 '드리핑 기법'을 완성시켰다.
그 후 드디어 잡지에 등장하며 '미국'의 눈에 띄게 된다. 당시 미국은 '미국을 대표하는 화가'가 없던 시기였다. 한 나라의 역사에 '미술사'를 빼놓기란 어려운데, 미국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건너왔던 유럽 작가들이 대다수였다. 그들 사이에서 '미국만의', '미국스러운', '미국 작가'가 등장한 것이다.
당시 미국은 '자유'를 외치던 나라였다.
그리고 폴락의 그림은 '상식의 파괴'였다.
폴락은 이젤에서 그리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그림을 내려놓고 내면세계를 표현했다. 다른 그림을 따라 그리거나, 현실을 모방하지도 않았다. '시각적인 표현'자체를 '미적 가치관'으로 제시했다.
'이것도 예술이 될 수 있어'라며 물감을 흘리고 뿌리는 자유분방한모습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자유'를 외치던 미국이 그를 '미국 대표화가'로 내세우기에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앤디 워홀이 등장하기 전 까지는..
2015년 약 2억 달러(한화 2133~2400억 원)에 판매된 작품
잭슨 폴록은 교통사고로 50세가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다소 황망한 죽음이었지만, 그가 남긴 미술의 가치는 영원했다. 미술의 새로운 기준을 대담하게 제안했고, 이는 오늘날에도 전 세계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오늘날 미술시장에서 그의 작품은 고가로 거래된다. 특히 48년도 이후 작품은 등장할 때마다 시장을 놀라게 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작품 리스트에 종종 언급이 될 정도이다. 미술시장뿐일까. 각종 미술학원에서 어린이들은 그의 이름은 몰라도 그가 남긴 '드리핑 기법'으로 자신들의 예술 세계를 표현한다. 패션계의 잭슨 폴록 사랑도 참 꾸준하다. 의상뿐만 아니라 신발, 소품까지 잭슨 폴록의 스타일은 여전히 '핫'하다.
생전에 그는 성격이 괴팍했다고 한다. 그를 발굴한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 역시 그로 인해 여러 번 당황했음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러한 그 덕분에 우리는 그림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과정과 행위'도 예술의 한 표현임을 알게 되었다. 이는 오늘날의 현대미술가들이 작품의 과정을 담아내는 것에도 영향을 미친다.
때로는 '미국'의 욕심으로 '만들어진'화가라는 평도 있다. 시대적 배경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클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을 땐 아예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묻고 싶다. 과연 그에게 '시대적 배경'이 전부였을까. 그는 미국의 선택을 받았지만 그 역시 미국을 선택했다. 덧붙여 그의 작업에 대한 고뇌, 열정, 천재성은 시대적 상황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 그만의 고유한 능력이다.
유럽의 추상미술과 초현실 미술을 뉴욕에 소개하고, 파리에서 뉴욕으로 미술사의 흐름을 이동시킨, 지금도 '구겐하임'가에서 영향력을 뺄 수 없는 페기 구겐하임은 이렇게 회상했다.
'잭슨 폴록을 발견한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여담으로, 훗날 페기 구겐하임은 '그의 작품 가격이 올라서 좋겠어요'라는 질문에, '그림 값이 올라도 너무 올랐다'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녀가 재테크의 수단이 아닌 작품의 가치로서 그의 작품을 사랑한 것을 알 수 있다) 예전에는 잭슨 폴록의 벽화 크기 작품을 비싸게 줘야 600만 불에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그의 작품은 등장을 할 때마다 '억'단위로 외쳐지고, 최고가는 2억 달러(한화로 약 2133~2400억 원)이다. 그것도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은' 물감을 흘리고 뿌린 작품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