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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딜러 한혜미 Mar 10. 2020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

예술과 사랑이 전부였던 '예술 중독자'



이런 이미지를 본 적 있는가.



아마 'Yes'라고 대답한다면, 그림을 그렸거나 혹은 그림을 그린 친구가 곁에 있지 않을까 싶다.

위의 이미지는 잭슨 폴록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폴락'의 한 장면이다. 번역으로 옮긴 저 대사가 나 역시 어찌나 웃프던지. 학창 시절 그림을 그리다가 좌절할 때 친구들과 sns로 공유했던 기억이 있다. '지랄 말고 그림 그려'라니..!



위 영화의 주인공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은 '한 번쯤은' 봤을 법한 그림의 창시자다. 그의 드리핑 기법과 액션 페인팅 덕분에 지금도 전국의 미술학원에서 아이들은 물감을 뿌리며 작품을 만들고 있으니까.





그리고 오늘 얘기하고 싶은 사람은, '잭슨 폴록을 발굴한 것이 인생의 가장 업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잭슨 폴록뿐이랴. 친구는 마르셀 뒤샹이었고, 마크 로스코와 클리포드 스틸, 한스 호프만의 첫 전시를 열었으며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은 침대에서 샀단다. 칸딘스키의 영국 첫 전시를 열어주고, 모빌의 창시자 알렉산더 칼더는 그녀를 위해 귀걸이를 만들어줬다.


이렇게 잭슨 폴록부터 피카소, 조르주 브라크, 칸딘스키, 몬드리안, 알베르토 자코메티, 막스 에른스트, 살바도르 달리, 이브 탕기, 조르조 데 키리코, 콘스탄틴 브랑쿠시, 마르셀 뒤샹, 마크 로스코.. 등 모두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20세기 미술사에는 굵직한 인물들이 있다. 그리고 그녀는 그들의 뒤에 있다.


추상주의와 초현실주의, 큐비즘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유행을 창조한 사람, 컬렉터이자 아트딜러였고, 때로는 그 누구보다 든든한 후원자였던 사람.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한 생을 살다 간, 스스로를 '외로운 늑대'라고 말하는 사람- 페기 구겐하임(Marguerite Peggy Guggenheim)에 대한 이야기다.





미국의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만레이(Man Ray)가 촬영한 페기 구겐하임



20세기 미술사를 그녀의 이름을 빼고 거론하기란 '피카소'를 빼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만약 그녀가 화랑을 열지 않아서 잭슨 폴록이나 마크 로스코, 칸딘스키의 작품들을 소개하지 않았다면, 전쟁 중에 막스 에른스트의 미국 망명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역사란 어떻게 달라졌을까.


자신의 안전보다 작품을 먼저 걱정했고, 전쟁 중에 '하루에 한 작품 사기(Buy a picture a day)'를 실천했던 '아트 애딕트, 미술 중독자' 였던 페기 구겐하임.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열정보다는 '천명의 남자와 잤다'는 말이 더 회자된다.


맞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 부분이 안타깝다. 그런데 아마 그녀가 살아서 내 글을 본다면, '내가 왜 안타까워? 난 안 부끄러워'라고 할지도. 적어도 내가 매체를 통해 기억하는 그녀의 모습은 그랬다. 당당함. '봐라 내 컬렉션들'이라고 하는듯한 자신감.









영화 '페기 구겐하임: 아트 애딕트'의 한 장



'그와 관계를 맺으면 그림을 더 싸게 살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몬드리안이 키스를 했는데 깜짝 놀랐어요. 그 나이에 대단하죠'

'존 케이지와는 딱 한 번밖에 안 잤어요'


지금 봐도 자극적인 이야기다. 아니, 요즘과 같이 개방된 세상에서도 실명이 거론된다면 굉장히 당혹스러울 텐데 50년 전에는 오죽했을까. 그리고 놀랍게도 이런 이야기들을 직접 한 사람은, 당사자인 페기 구겐하임이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미술사뿐만 아니라 20세기 예술사의 한 축을 담당했던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서술했다.


당연히 그 시절 그녀의 회고록이 출간되었을 땐 '정신 나간 책(Out of my head)'이라는 자극적인 혹평이 줄을 잇게 된다. 대중으로부터 '난잡한 여자'가 되었다. 아니, 그녀 정도라면 자신의 '업적'에 대해서 평생을 이야기해도 모자랄 텐데, 왜 굳이 그런 이야기들까지 했던 걸까. 쉽게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과거 영상들을 봤을 땐 의외였다. 내가 생각했던 모습은 천하를 호령할 것 같은, 사내대장부의 당당한 모습이었던 걸까. 적어도 남성의 소규모 클럽이었던 미술계에서 두각을 드러낸 그녀였기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호랑이 같은 위풍당당함이었다.


의외였다. 그녀는 매우 조심스러워하는, 어딘가 불안정해 보이지만, 때로는 수줍어하는 모습도 있는, 그런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녀의 이런 모습에 끌렸다.







그녀의 가족사는 빼놓을 수 없는 그녀의 이야기다. 감히 가하자면 '슬프다'. 영화나 소설에서 등장할듯한 '어느 불우했던 재벌가 이야기'다.


'구겐하임'이라는 성 답게 그녀는 부유했다. 부유했던 두 집안의 자제였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만남. 호화스러움이 행복으로 연결되었다면 좋았겠지만, 바람둥이로 유명했던 아버지 집안과 정신적인 문제가 있던 어머니의 집안은 그녀의 부모에게도 내려졌다.


어렸을 때부터 조숙했던 그녀가 '아버지의 애인'을 언급했다가 식탁에서 쫓겨났던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그렇듯 아버지는 외도를 일삼았고, 타이타닉 호에 내연녀와 탔다가 배가 침몰하면서 그녀의 곁을 떠난다. 어머니 역시 그녀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진 못했다. '좋은 어머니였나요?'라는 질문에 '그 시절에는 좋은 어머니가 없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심지어 그녀는 '엄마는 날 미치게 만들었다'라고 회상했다.


이뿐이랴. 이모부는 이모에게 못 견뎌 자살하고, 친언니는 출산 중에 죽고, 친동생의 자식들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가 만든 가정 역시 평탄치 못했다. 두 차례 결혼했으나 첫 번째는 남편의 폭력에 못 이겨 이혼했고, 두 번째 남편은 그녀의 재력을 사랑했기에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나서 이혼했다. 7번을 낙태했다. 자식으로는 첫 번째 남편 사이에 낳은 아들과 딸이 있었는데, 아들은 자신을 멀리했고 딸은 반대한 남자와 결혼한 후 자살한다. 남들은 한 번만 겪어도 힘들 일들이 그녀의 가족 사이자 인생이었다.







페기 구겐하임은,  '20세기 대표 컬렉터'라는 호칭답게 작품들과 촬영한 사진이 참 많다. 많고 많은 사진 속에서의 그녀는 편하면서도 당당해 보이지만, 이 사진은 다르다. 딸 페긴 베일의 작품과 촬영한 사진인데 유독 쓸쓸하게 느껴진달까.


가족사의 이야기에서 언급했듯 그녀의 딸은 그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페긴은 딸과 자신의 관계를 '서로 가장 잘 이해하는 사이'라고 얘기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딸에 대해서는 불안정한 성격이라고 칭한다. 스스로의 어린 시절을 불안정했다고 했듯이 딸도 그녀의 어린 시절의 불안정함을 닮은 것이다.








그림에 빠져서 딸을 사랑하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호히 'No'라고 얘기하고 싶다. 페긴이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자신의 화랑에서 페긴과 아이들을 위한 전시를 열었고, 훗날 프리다 칼로를 미국에 소개한 여류화가 31인 전도 딸이 아티스트로서 함께했으니까.


물론 페기가 오직 딸을 위해서 전시를 열었다고 하기엔 어려울지 몰라도, 딸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그렇다면 이보다 멋진 사랑법이 어디에 있겠냐만은, 안타깝게도 페기는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에서 서툴렀던 것 같다.


이렇듯 그녀의 인생에서 '가족의 사랑'이란 단단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녀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남자가 있었다. 영국인 소설가 존 홈스. 그러나 그 역시 오래 함께하진 못했다. 그 마저도 손목 수술 후 깨어나지 못하게 되면서 그녀를 떠난 것이다. 그와 참 행복했다고 회상하는 그녀는 그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그는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지 일일이 이끌어줬어요. 나를 보다 진지하고 중요한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죠.'


그 후 그녀는 서두에 서술했듯 굵직한 예술가들과의 만남을 반복한다. 20세기 미술사를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긴 그녀가 선택한 마지막 보금자리는 베네치아로 였다. 그곳에서 그녀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작품들과 함께 여생을 보내며 잠든다.








처음부터 대단한 안목으로 미술품을 사들인 건 아니라고 한다. 실패 없는 선택이 어디 있으랴. 두서없이 수집했던 작품에서 경험을 쌓으며 그녀의 스타일과 안목을 갖추며 컬렉터가 것이다. 현대미술을 접하고 '도저히 헤어 나올 없었다'며 푹 빠진 그녀. 직관을 따랐고 과감히 행동으로 옮겼다.


그래서일까. 페기 구겐하임이 푹 빠졌던 현대미술은 그녀와 참 닮아있다. 작품을 보면 그 작품을 만든 작가와 닮아있듯, 컬렉팅을 한 작품들 역시 컬렉터의 느낌과 닮는다. 그녀의 컬렉션은 '고상한' 작품이 아닌 그 시절 '아웃사이더' 예술에 가깝기 때문이다. (지금 봤을 땐 모두 대단한 작가들이지만!)


물론 그녀의 안목에는 든든한 조력자가 있었다. 그녀에게 추상주의와 초현실주의를 알려주며 안목을 키워준 마르셸 뒤샹, 잭슨 폴록의 그림을 이해 못할 때 진지하게 조언해준 몬드리안이 대표적이다. 그녀는 그들의 조언을 받아들였고, 이는 곧 영국의 현대미술에 대한 인식을 바꿨고, 뉴욕에서 20세기 미술을 꽃피우게 되었다.



페기구겐하임 컬렉션) 왼쪽 위부터, 피카소/ 알렉산더 칼더/ 알베르토 자코메티/ 브랑쿠시/ 몬드리안/ 마크 로스코/ 르네 마그리트/ 칸딘스키/ 잭슨폴록



그녀의 지인은 '도발적이고 기묘한 예술은 그녀의 모습'이었다고 회상한다.


솔직함이 도발로 받아들여졌던 시대,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했던 그녀는 컬렉팅을 했고 결국 '페긴 구겐하임'이라는 최고의 걸작을 만들어냈다.


그녀의 컬렉팅은 이러한 갈망, 그리고 '결핍'에서 나온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가 대단하다. 보통 좌절할 상황이 생기면 선택은 둘 중 하나다. 그 상황에 빠지거나, 받아들이고 나아가거나. 그녀는 후자였다. 자신에게 부족한 사랑을 찾기 위해 늘 사랑할 사람과 무언가를 찾았고, 사랑을 받지 못함에도 자신의 신념을  밀고 나갔고, 주변에서 철저하게 이용당했음에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던, 상황이 주는 결핍을 그녀는 성장의 발판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도구'로 예술을 삼았다.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예술에 쏟았고, 진정으로 예술을 사랑했다.













나는 모 강의에서 '미술작품은 세상을 더 넓은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작품을 산다는 건 자신을 성장시키는 행위다 '고 이야기를 했다. 페기 구겐하임의 삶에서도 볼 수 있듯이. 재벌가의 이단아로 취급되었던 그녀는 예술의 감성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고 스스로를 성장시켰던 것이다.


그녀도 잘 알 것이다. '스스로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냈는지.


그녀는 회고했다. '예술과 사랑이 전부였다'라고.

인생을 산다는 건 한바탕 꿈같다고 말했던 그녀는 이전에 한 번도 없었던 컬렉터다.








사랑했지만 사랑받을 수 없었던- 스스로를 가장 사랑했으나, 또 가장 사랑하지 못했던 사람.

그 사람의 갈망이 만들어준 20세기 미술사. 


현재 페기 구겐하임이 수집했던 작품들은 모두 그녀의 삼촌이 운영했던 '구겐하임 미술관'에 소장되어있다. 그 덕분에 관람객들은 뉴욕과 베니스에서 그녀의 컬렉션을 만날 수 있다. 이는 자신의 작품이 잘 보존되길 바라는 그녀의 뜻이었다.


그렇게 결국 그녀는 가장 사랑했던 작품들을 가족의 품으로 보내며 인생을 마무리한다.

어쩌면 그녀가 진정 바랐던 그 품 한 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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