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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ESI Jan 19. 2022

현대인의 저장강박증, ctrl+S

백업의 중요성

 얼마 전 에픽하이 타블로가 IOS 업데이트로 10년간 적어온 기록을 전부 잃어버렸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이 자리를 빌려 타블로에게 위로의 말을 보낸다. 그의 귀한 작업을 볼 수 없게 된 우리에게도.


 현대인은 다람쥐마냥 파일을 모으고 또 모은다. USB, 외장하드, 아카이브, 클라우드 등 이중 삼중으로 백업한다. 그걸로도 부족해, 어떻게 하면 더 저장할 수 있을지 궁리한다. 빅데이터의 시대에서 모든 데이터는 나름의 가치를 가진다. 언젠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Delete(삭제 키)를 망설이게 한다. 차마 지우지 못한 데이터가 쌓이고 쌓여 저장장치만 늘어갈 뿐이다. 그래서 오늘은 '백업'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나는 매일 카페로 출근(!)해 글을 쓴다. 하루는 글을 쓰는데 화재경보가 울리는 게 아닌가! 사이렌 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미친 듯이 ctrl+S(저장 단축키)를 눌렀다. 왼손으로 ctrl+S를 누르며, 눈은 빠르게 동태를 파악했다. 직원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기계를 확인했다. 카페 안은 사이렌 소리만 가득했다. 긴장감 어린 눈동자들이 좌우로 빠르게 움직였다.


 으레 그렇듯이 화재경보는 오작동이었다. 잠깐의 소동이 지나가고 사람들은 다시 자기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이라면 이쯤에서 넘어가겠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대신MBTI가 N인 사람답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당장 불이 나면 들고나가야 할 것과 버려도 되는 게 뭐가 있지?'


  일단 핸드폰과 지갑은 무조건 챙겨야 한다. 둘 중에서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뭘 가져가야 할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2022년에는 핸드폰이 목숨보다 중요하다. 지갑에 있는 카드는 핸드폰으로 정지시킬 수 있지만, 지갑으로 핸드폰을 찾을 수는 없지 않은가. 한편, 노트북이 자꾸 눈에 밟힌다. 급박한 상황에 얘까지 챙기기엔 너무 크지 않나? 그래도 일단 들고 가긴 해야 한다. 여기 있는 걸 잃어버릴 바에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르니까. 생각하다 보니 롱 패딩도 욕심난다. 이 엄동설한에 어찌 맨몸으로 나선단 말인가. 아니, 이러다가 못 나가는 거 아니야?







 현대인의 고질적인 습관 중 하나가 ctrl+S가 아닐까 싶다. 나는 컴퓨터 자격증 준비를 하면서 이 습관이 생겼다. 그땐 플로피디스크(!)를 썼는데 툭하면 파일이 날아갔다. 그래서 선생님은 시험보다 ctrl+S가 중요하다며, 10분에 한 번씩 누르라고 가르치셨다. 이 자리를 빌려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어찌나 몸이 배었는지, 다른 일을 하다가도 가끔씩 ctrl+S를 누르곤 한다. 하지만 항상 저장을 깜빡할 때 날라간다는 머피의 법칙.


 김영하 작가는 소설 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백업'이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다른 건 추상적이어서 가르칠 수 없지만, 단 하나 충고해주고 싶은 게 있다면 백업일 것이라고. 그는 쓰던 글을 다 잃어버린다면, 모든 의욕을 잃고 직업을 바꾸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열심히 쓴 파일이 날라간 경험은 다들 한 두 번씩 있을 것이다. 그 허탈함이란, 차라리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 진다. 이러니 저장 강박증이 안 생길 수가 있나.


 한편, 같은 상황을 다르게 접근하는 사람도 있다. 모 작가는 쓰던 원고를 잃어버려 다시 쓴 적이 있다고 한다. 하필 스스로 정말 잘 썼다고 생각한 부분이라 속이 너무나도 쓰라렸다고. 하지만 어쩌할까, 이미 잃어버린 뒤인 것을. 기억을 더듬어가며 꾸역꾸역 잃어버린 부분을 다시 썼다. 한참 뒤, 예전 원고를 찾았는데 비교해보니 새로 쓴 게 더 괜찮았다는 후문. 그때 그는 한 번이라도 더 퇴고하는 게 무조건 더 좋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물론 퇴고하는 게 제일 좋겠지만, 그래도 쓴 글이 아까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만해도 새로 쓸 때마다 그 전 원고를 모두 저장해둔다. 어디 내보일 곳도 없지만 그걸 쓰기 위해 들인 정성과 시간이 아깝다. 한참 뒤, '예전에 썼던 문장이 괜찮았는데. 그걸 가져올까?'하고 열어보면 역시나 형편없다. 어떻게 이걸 보고 잘 썼다고 생각한 건지 당혹스러울 정도다. 역시 글이란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치는 게 무조건 남는 거다. 차라리 눈 딱 감고 다 지우고 다시 쓰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역시 내 손으로 지우진 못하겠다. 이게 창작자의 마음인 걸까?








 혹시 불이 났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미리 주문해둔 샌드위치가 아까웠다. 나는 샌드위치를 우걱우걱 먹으며 생각했다. "역시 백업이 중요해." 그리고 좋은 외장하드를 새로 마련해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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